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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Nov 13. 2020

여기서 정치 얘기 같은 거, 합시다!

여기서 정치 얘기 같은 거 하지 맙시다!

단체 카카오 톡 방에서 가끔 보는 경고문이다. 동호회 같은 친목 모임에서 대화방은 공지 사항을 올리는 게시판도 되고 회원들끼리 좋은 글 재미있는 얘기를 나누는 정보의 장터 역할도 한다. 이 화목한 사이버 공간에 간혹 정파 간에 시비가 걸려있는 사안이 비집고 들어온다. 회원이 직접 쓰거나 인용한 글을 본 다른 회원이 못 참고 부정적인 답글을 달면서 카톡 방은 긴장하기 시작한다. 답글에 대한 답글이 날아다니다가 회원 간 비방으로 이어진다. 관전하던 이들이 나서서 뜯어말리면서 봉합이 되지만, 의견이 갈린 회원들 간에 단체전으로 비화하기도 한다. 마치 국회 상임위에서 벌어지는 여야 간의 다툼을 보는 듯하다. 회원 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운영하는 대화방의 분위기가 썰렁해진다. 대화방은 물론 모임에서 탈퇴하는 회원이 생기고 아예 의견을 같이하는 회원끼리 몰려가서 따로 공간을 개설하기도 한다. 



시댁 하고는 정치 얘기 안 해요.

오프라인에서도 문제는 마찬가지. 친구끼리, 심지어 부모 자식 간에 이런 문제로 서먹해진다. 나는 집사람하고 일상사에 공감을 많이 하는 편이지만 정치인들에 대한 평가는 갈릴 때가 많다. 그래서 같이 뉴스를 볼 때는 대화하지 않는다. 혼잣말이나 원색적인 감탄사 (=욕), 심지어는 깊은 한숨까지도 자제한다. 정치 얘기의 휘발성이 높아서 언성이 높아지는 데 불과 몇 마디도 필요 없기 때문이다. 정치와 무관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 바닥에서 먹고사는 사람들도 아니면서, 지지하는 정견이 다르다고 가까운 사람끼리 아웅다웅하는 건 순진하기도 하고 좀 웃긴다. 여러 사람이 고민하다가 고작 내놓는 대안이 '여기서는 정치 얘기하지 말자'는 거다. 그렇지만 얼마 못 간다.




그렇다고 정치 얘기를  배제시키는 게  능사는 아니다. 


일단 '정치 얘기'의 구분이 애매하다. 원전, 비정규직, 아파트 시세 문제는 정치적 사안 이전에 사회적 관심사다. 우리 모두의 고민에 정치가 개입해서 대립하는 현안들이다. 정책의 큰 줄기가 아닌 정파의 득실에 따라 한 쪽 편에 서면서 정치 얘기가 돼버렸다. 그러면 정치인들이 반목하는 건은 뭐가 됐든 여러 사람 모이는 공간에서는 입 다물고 피하는 게 최선인가. 어려서 어른들 얘기할 때 참견하면 못 쓴다고 핀잔받던 생각이 난다. 그런 건 정치인들이나 유튜브에 맡겨 버리고 '여기서'는 고혈압에 좋은 음식 10가지나 꿰고 있어야 할까? 


의견이 엇갈리는 많은 문제를 여러 공동체에서 거론하고 토론하면서 사회가 발전한다. 마찰이 싫어서 날씨 얘기만 하는 건 교통사고 날까 봐 운전 안 하는 격이다. 사회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어느 나라나 있다. 미국도 낙태 허용, 총기 허가, 이민정책 등 공화당과 민주당 간에 해묵은 정쟁거리를 갖고 대립한다. 그 사람들은 '근본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사는 이민 국가이면서도 다른 의견을 비교적 원만하게 소화하는 것 같다 ( 요새는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 워낙 다민족이 모여 살다 보니 다르다는 걸 한 자락 깔고 시작해서 오히려 마찰이 덜한지도 모른다. 그런 논리라면 우리는 한민족 한 핏줄이라 주위에 있는 사람이 다른 생각하는 걸 못 봐주는 걸까?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한 말이다. 요즘은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도 인터넷 공간에서 여론을 형성하거나 집단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앞으로 점점 더 커져서 대의민주주의가 무색해질 수도 있다. 다수의 의견이, 그것을 대변해야 할 정파의 이익에 가려지고 왜곡되는 정치 현실은, 정치 발전보다는 정치 파괴로 극복해야 할 것 같다. 


요새는 인터넷을 통하여 좋은 물건을 싸고 편하게 산다. 앞으로는 국민들이 비용만 많이 들고 질은 형편없는 기성 정치체제를 건너뛰고  온라인에서 질 좋은 정치를 '직구' 해서 소비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다수의 바람이 정직하고 투명하게 종합되면 현명한 집단 지성을 이룬다. 이렇게 해서 절약하는 유무형의 정치 유통 비용은 막대할 것이며 쓸 데는 많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터넷에 사용자 리뷰 올리듯이, 유권자들도 사회의 제반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여론에 참여하는 연습을 해두는 게 좋지 않을까 한다. 




정치 얘기로 시작되는 불화는 내용보다 방식이 문제다.


의견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자기 의견을 주장하고 설득하는 토론은 인내와 기술이 필요하다. 그리스 도시 국가에서 시작하여 영국의 의회제도, 프랑스혁명 그리고 미국의 자유주의로 이어진 민주주의 역시 토론 문화로 시작했다고 한다. 토론의 우선 조건으로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꼽는 이유는 대개 토론의 문제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데서 발단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가지고 있는 '다른' 의견을 인정하지 못하면 부정적 단정으로 이어지고 얘기는 중단된다. 인정은 존중이며 존중은 동의와 다르다.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 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 한다'라고 했다. 다른 사람과 생각을 같이하지는 않지만 이들과 화목할 수 있는 군자의 세계를, 밖으로는 같은 생각을 가진 것처럼 보이나 실은 화목하지 못한 소인의 세계와 대비시키고 있다.


대안 : 나를 주어로 놓고, 호·불호의 대상을 생각 자체로 한정한다.


일단 누가 나와 생각이 다른 얘기를 꺼내도 사람이 아닌 내용에 집중한다. 그리고 한마디 하고 싶으면 나의 생각으로서 전달한다. '나는 그런 얘기 처음 들었다' 든지,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요새 정치인들이 많이 씀)' 같이 일인칭 영어 문장의 번역처럼 시작하면 극단은 면한다. 생각은 자유다. 따라서 생각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는 것도 자유다. 내 생각을 말한 것이므로 트집 잡히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다.


그렇지 않고 '그건 말도 안 된다'처럼 딱 잘라 단정을 해버리면 분위기가 심란해진다. 한발 더 나가서 '어떻게 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느냐'라고 생각이 아닌 사람을 비난하면 선전포고가 된다. 정치인들은 인신공격하고 돈을 받지만 우리는 상처만 받는다.  '그런 거 올리지 말라'라는 '명령'도 단톡 방에 불을 붙이는 번개탄이다. 


생각과 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 생각이 싫다고 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까지 공격하는 건, 코로나 확진자의 입에 손 세정제 뿌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기 생각만 옳다고 우기며 상대방을 가르치려 들면서 대화는 중단된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 말을 안 듣는다. 말하는 데 3년 걸리고 듣는 데 30 년 걸린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미국 대선 토론하는 걸 보니 사회자까지 세 사람이 동시에 떠든다. 거기도 요새 만만치 않다. 



그림 The Political Discussion (1889)  Emile Friant (French, 1863–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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