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의 경영학
지난 주말 집사람하고 영월 시골집(농막)에 다녀왔습니다. 영월은 날씨로는 비올 때, 계절은 늦가을에서 겨울이 환상적입니다. 거실에 앉아 촉촉이 내리는 비를 관통해서 앞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구가 떠오를 듯합니다 ( 떠오른 적은 없습니다). 가을-겨울의 바삭한 햇빛과 청량한 바람은 선조들이 자연을 찬양하면서 풍광風光이 수려하다고 감탄한 이유를 짐작하게 합니다. 서양도 비슷한 표현을 쓰던데요. 남불南佛 프로방스 지방에 많은 화가들 (고호, 세잔, 르누아르 같은 이들) 이 몰린 이유를 현지의 동료에게 물으니 그 고장의 햇빛이 양질이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과연 바람과 빛의 화가들이라고 할 만합니다.
하지만 제가 비 오는 영월을 좋아하는 첫째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비올 땐 마당의 제초부터 시작해서 텃밭 김매기 등 모든 야외 작업을 중단합니다. 비 오는 날은 공치는 (축구선수 빼고) 날이지요. 그리고 가을이 되면서 잡초도 생장을 멈추어서 제초와 김매기도 종료합니다.
그러나 십일월 첫 주말 할랑한 (=군대 용어로 여유롭고 편한) 안식의 일정은 여주 휴게소를 지날 때쯤 집사람의 날 벼락같은 선언으로 파탄나고 맙니다. 지금 영월에 김장을 하러 가는 거랍니다. 가방에 쑤셔 넣은 두어 권의 책도 짐이 되는 순간입니다. 매년 시골에서 김장을 해서 올리던 전통을 올부터 그만 하기로 하지 않았냐고 항의했지만 그건 저의 희망사항일 뿐이라고 일축합니다.
그간 제가 거의 매년 영월 김장에 참여했음에도 이번에 긴장하는 이유는 우선 마음의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허를 찔린 충격과, 무엇보다도 조직의 구성이 저에게 불리한데 있습니다.
몇 년 전까지 김장엔 도우미 아줌마 포함 약 4-5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군단이 투입되었지요. 일단 작업에 들어가면 도우미 아줌마는 총사령관이 되어 진두지휘하고 다른 사람들이 도우미가 됩니다. 장모님이 바로 밑에서 사령관을 도와서 제 집사람과 집사람 친구들의 실무를 감독합니다. 도우미 아줌마는 경험도 많지만 일의 과정을 상황에 맞게 조정하는 일머리가 있고 조직의 장악력 (카리스마) 또한 뛰어납니다. 한마디로 경륜이 있습니다.
나이, 사회적 위치, 학식 따위는 철저히 배제하고 김장 역량 위주로 조직의 위계를 정하고 업무를 분담하는 아름다운 질서가 형성됩니다. 도우미 아줌마가 사장이면 저는 대리 정도 위상이 됩니다. 사장은 임원들을 들볶지 말단은 괴롭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귀여워하지요. 저는 시키는 대로 재료를 들어 옮기거나 마당에 불을 때고 또는 가게 심부름 가는 대기 외곽조직으로서, 김장의 본류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으니 힘은 들어도 정신적인 부담은 덜 했습니다.
조직의 목표에 따라 지휘체계를 설계하고 권한을 안배할 때 직원들의 직무 만족도는 향상됩니다. 그런데 현실은 비전문적이고 전횡적인 인사운영으로 혼돈을 겪고 있는 기업 조직이 허다하지요. 연공서열 기준의 소위 '짬밥 문화'가 조직의 역량과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집사람과 저 둘 뿐으로 팀이 단출합니다. 물량이 줄고 조직도 대폭 축소됐지만 과정은 그대로입니다. 김장의 의미는 배추김치를 한 번에 많이 담는 겁니다. 그런데 영월에서의 저희 김장은 공정이 앞뒤로 많이 확장됩니다. 우선 밭에서 배추를 뽑아서 다듬는 일부터 시작해서 용인 집으로 가져와야 끝납니다. 지리산 종주에 비유할 때, 성삼재에서 출발해서 중산리로 내려오는 34 kM가 일반 공정이면, 영월 김장은 화엄사에서 시작해서 대원사로 내려오는 화대 종주 46 kM에 해당합니다. 잘못하면 중간에 반야봉까지 들립니다.
집사람은 김장의 일부 실무를 해봤지 총괄한 경험이 없다는 걸 저는 압니다. 기술과 경험이 서투른 상사 밑에 있는 부하는 엄청나게 피곤해진다는 게 제 직장 생활의 경험입니다. 제 위상도 이번에 책임자 바로 밑의 이인자로 승격이 돼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이 되었지만 만인은커녕 제 옆엔 이장 네 강아지 '망치' 밖에 없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게 종래의 외곽조직 업무와 더불어 배추를 씻는 핵심 업무의 일부가 배당이 되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절인 배추에 낙엽 조각이 붙은 채로 배추를 쌓아놓았다고 지적을 받습니다. 영혼 없이 일을 한다는 거지요. 한번 헹군 배추가 그대로 속 넣는 공정으로 간다는 걸 모르니까 대충 씻었지요. 다시 배추를 물속에 집어넣습니다.
그때 라디오에서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를 틀어 주면서 '영감이란 첫 번째 부름에는 나타나지 않는 손님' 운운하는 사연을 진행자가 말하는 데 그게 차이코 형님의 말이란 건지 여부를 잘 못 알아들었어요, 혼나느라고. 우리 브런치 식구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말 같은데...
이제 씻는 게 끝난 거 같아 고무장갑과 장화를 막 벗자마자 수돗가에 가서 고무 다라이 (함지박의 일본 말)를 닦아오라는 지시가 떨어집니다. 고무장갑, 장화 벗는 게 얼마나 성가신지 해본 사람은 압니다. 공정에 대한 큰 그림을 모르니 노력과 시간의 낭비가 이어집니다.
일정한 구간을 위임받은 실무자인지 아니면 그때그때 시키는 대로 하는 비서인지 업무 성격에 대한 정체성이 모호합니다. 정확한 작업지시나 교육도 없습니다. 우왕좌왕하는 상사 밑에서 일을 하면 일을 두 번씩 반복하기도 합니다.
누가 와서 제게 뭐 하냐고 물으면 다라이 씻으라고 해서 그러고 있다고 하는 상황입니다. 매슬로우의 근로의 동기에서 맨 밑의 생리적 욕구나 안전의 욕구에 해당하는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아실현의 욕구 단계에 도달하면 나는 '김장을 하고 있다'라든지 '월동준비를 한다'라든지 하는 말이 나오겠지요.
상사와 부하가 일대일 수직 구도가 형성되는 조직은 비생산적입니다. 상사가 직속 부하에게 배분하는 업무의 성격이 모호해집니다. 상사는 일의 일단을 떼어서 부하에게 위임을 하고 다시 자기가 하는 일의 비서 역할도 주문합니다. 일이 상사의 즉흥적 선택으로 밑으로 쏠립니다. 실무책임자와 보조 역할이 섞이면서 부하는 피곤해집니다.
한편 부하도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상사의 보조로 전락하고 맙니다. 저는 직장에서 부하가 업무를 주도하지 못하면 (=시키는 것만 겨우 함) 물었습니다. 당신이 실무자냐 아니면 내 비서를 하고 싶냐고. 이런 구분은 상사와 부하가 공히 지켜야 하는 선입니다. 제가 직장 생활 시작할 때는 구분이 없었습니다. 책상 배열도 극장식으로 되어 있어 책임자는 뒤에 앉아 하루 종일 불러 젖히고 일을 두서없이 시켰지요.
이런 상황에서 상사가 의욕까지 넘치고 완벽을 추구할 때 열악은 최악으로 치닫습니다. 무가 많이 남으니 깍두기까지 담겠다고 하면 오늘 집에 못 갑니다. 지리산 종주하다 기왕이면 반야봉도 들려서 가자는 식입니다. 그때 이웃의 촌로 할머니가 등장하십니다. 허리가 안 좋으셔서 사륜 스쿠터를 타고 오시자마자 팔십 노인은 상황을 일거에 파악합니다. 우선 물에 다시 처넣은 배추를 즉시 건져 올리지 않으면 소금기가 도로 빠진다고 응급 처리를 지시한 다음 현재 질서 하의 공정에 소리 없이 스스로 편입되십니다. 사태가 진정됩니다. 깍두기는 보류됩니다.
노인은 전에 그 도우미 아줌마와 비교하면 급수가 두 단계 정도 올라간 명장 수준입니다. 우선 김장의 경험이 오래되었고, 배추 씨를 뿌려 직접 재배해서 김장으로 이어지는 전 공정을 수십 년 반복한 구루에 속하십니다. 마치 인도양에서부터 카약 타고 시작해서 에베레스트산의 8800 미터를 온전히 오르는 '해발 고도' 등정에 비교할 수 있지요.
그리고 당신의 방식을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요즘 새로운 농법이 많아져서 적절한 걸 골라서 하면 된다고 겸손하게 굽히십니다. 지휘 방식도 옆에 비껴 서서 현재 책임자의 위상을 존중하면서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유보적 표현으로 컨설턴트처럼 도움을 주십니다. 경륜 있는 경영자는 자기 경험만 고집하지 않습니다. 다만 절인 배추에서 소금기가 빠져나가는 위급 상황은 단호하게 지적하고 난 후에 말입니다. 촌로가 오신 이유는 집사람의 실력을 아는 상황에서 그냥 있자니 당신 맘이 불편해서 일 겁니다. 인간은 이웃의 고통을 공감하는 본능이 있음을 재확인합니다.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군자는 천하의 일에 있어 꼭 해야 하는 것도 없고 절대로 하면 안 되는 것도 없으니 의를 따를 뿐이다.
논어 이인里仁 편 / 낭송 논어 (김수경 외)
촌로 옆에서 거들면서 예전 얘기를 청해 듣습니다. 배추는 벌레가 포기 속에 있어 농약을 뿌리지 않고 재배하기가 힘드셨답니다. 농약 없는 예전엔 그럼 어떻게 했나요? 일일이 젓가락으로 잡았지요. 다 못 잡으니까 배추에 구멍이 듬성듬성 나고 노란 배추 속도 없고 파란 잎만 먹었다네요. 그래도 농약 배추로 만든 김치는 금방 아신 대요. 그 노인은 걸어 다니는 식물도감입니다. 저건 무슨 꽃이지요? / (즉시) 몰라요. / ? ? 아니 모르시는 풀꽃도 있나요? / (단호하게 ) 외래 종예요... 농촌에도 국적불명의 외래 식물들이 점점 늘어가며 재래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황소개구리만 문제가 아닙니다.
조직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리더의 핵심 역량으로 경륜, 소통 그리고 동기 부여를 들 수 있습니다. 제가 김장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또 한 가지의 이유는 김치의 품질입니다. 그간 영월에서 김장한 김치는 그다지 제 입맛에 맞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무농약 배추라서 그런 건 아닐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외식을 할 때 유난히 김치를 탐합니다. 맛있는 김치는 여기서 근로에 대한 보상이자 가치가 됩니다. 다시 위에 있는 매슬로우의 근로 동기 피라미드로 돌아가서, 김치의 품질은 보상으로서 생리적 욕구이자 달성된 목표에 대한 신뢰로서 자아실현에도 해당하지 않을까요?
추신 :
1. 이렇게 김장 한 번 보조한 것 같고 비화를 장황하게 늘어놓을 수 있는 건 집사람이 제 브런치를 읽지 않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식구도 읽지 않는 글을 제 친구들한테는 미안해서 보라고 못하겠더라고요.
2. 글 중에 나온 차이콥스키의 영감 얘기를 잘 아시는 분은 댓글에 달아주시면 여러분들께 도움이 되겠습니다. 11월 15일 일요일 아침 KBS 라디오 클래식 채널에서 방송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