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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Dec 01. 2020

불편하고 어색한 우리 인사말

인사법이 우리 사회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다.  

들은 얘기인데, 미국의 한 대도시에서 일하던 우리나라 기업의 주재원들이 식당 앞에서 현지 경찰한테 불심 검문을 받았다고 한다. 동료들과 저녁 먹고 나서 차에 타고 떠나는 상급자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는 짙은 색깔의 양복쟁이들을 지나가던 순찰차가 수상하게 본 거다. 


우리나라에서 인사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대하는 존경의 표시로 기능해왔다. 아랫사람이 인사말과 동시에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고개를 숙이는데 위아래 위상의 격차에 비례하여 그 굽힘의 각도를 조절한다. 이 행위가 성공적일 때 예절이 깍듯하다는 칭송을 받는다. 인사 하나만 잘해도 사회에서 인정받는다.


'진지 드셨냐', '밤새 안녕하셨냐' 등을 중얼거리는데 몸을 낮추는 가시적인 동작이 수반되어서 그런지 인사에서 인사말 자체는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 아랫사람의 복합적인 인사 행위에 비해 윗사람의 응대는 하는 둥 마는 둥 싱거울 정도로 편파적이다.


군대에서 하급자가 먼저 상급자에게 거수경례를 붙이듯이, 서열에 기준한 우리나라 인사법은 대가족이나 군대처럼 위아래 서열이 분명한 조직에서 편리한 예절이다. 한편 호칭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사법이 오늘날 수평 방향으로 팽창하는 사회에  아직 적응하고 있는 중이라서 때로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러면서도 인사의 상하 예절 기능은 아직 잔존하고 있어 아랫사람을 평할 때 인사성의 유무를 가지고 따지기도 한다.


점심시간 즈음에 만나면 '식사하셨습니까'가 유용한 인사말이 되는데 당연히 상대방의 점심 취식 여부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 점심을 건너 뛰거나 이상이 생겼어도 형식적인 인사가 뜻하지 않게 전개되기 전에 적당히 얼버무린다. 영어 사용자가 상대방의 상태에 관심이 없으면서도 물어보는 How are you 대해 몸이 아파도 으레 Fine, thanks라고 반자동으로 대답하는 것과 같다 (전날 병가로 회사를 빠진 직원은 예외다. Better라고 대답해서 꾀병으로 결근한 걸 들키지 않게 조심한다.).  차라리 위아래가 분명한 관계에선 하급자가 고개를 숙임으로써 간단히 인사 예절이 해결될 텐데, 수평관계에서는 마땅한 인사말이 아직 궁하다.


 아쉬운 대로 hi 나 good morning 같은 외국어를 가져다가도 쓰고 직역을 해서 '좋은 아침'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마치 와인을 막걸리라고 번역한 것처럼 어색하다. 사회변화에 걸맞게 상호 간에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인사말류의 정착이 아쉽다. 중립적인 위상에서 사용할 인사말이 마땅치 않으면 서로 기피하는 현상도 생긴다. 


인사법은 문화의 일부이므로 나라와 민족에 따라 차이가 많다. 프랑스 사람들은 매일 보는 동료끼리 아침마다 악수나 볼 키스를 하는가 하면,  중동에서는 벌판에서 만난 이웃과 한참을 서서 인사말을 교환하는데 (여자를 제외한) 상대방 식구의 안부를 묻고 마침내는 가축의 안부까지 챙긴다고 한다. 필자는 두 사람이 말다툼하는 줄로 오해했다. 거기 비하면 거리를 두고 행동으로 표시하는 우리나라의 비접촉식 인사 방식이 코로나 시대에 유리하기는 하다.




우스꽝스러운 인사법도 있다.

언제부터인지 공직자나 기업체 간부가 기자들 앞에서 사죄성 발표를 할 때 허리를 90도로 굽히는 걸 본다. 대개 여러 명이 단체로 절도 있게 꺾는데 전에는 안 하던 짓이다. 일본 사람들 하는 걸 테레비에서 재미있게 보고 흉내 내는 걸로 추측한다. 따라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발전과 무관한 우스꽝스러운 몸짓이다. 말로 얼마든지 사죄할 수 있다. 요즘 어린애들에게 강요하는 배꼽인사도 같은 경우다.


더러운 인사법도 있다.

부정한 청탁의 대가로 뇌물이나 향응을 베푸는 걸 '인사 한번 한다'로 은밀하게 표현한다. 없어져야 할 추한 인사다. 


쓸데없이 정중한 인사법도 있다

테레비 뉴스 앵커가 취재기자와 대담 형식으로 뉴스를 진행하다 순서가 끝나면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를 한다. 어떤 방송에선 마치 사돈 간에 상견례하듯이 이마를 찧을 듯이 정중하게 인사를 차린다. 매일 보는 동료들끼리 뭐하나 싶다. 그리고 뉴스 프로그램을 끝내면 남녀 앵커끼리 머리 숙여 인사를 하고 어떤 데서는 화면에 보이지 않는 스태프들에게까지 인사를 챙긴다. 그들도 자기들끼리 인사 차리는 게 이상하다는 걸 아는지 조금씩 바꾸어가기는 한다. 안 하든지, 약간 숙이기도 하고, 일부러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있기도 하는데 모두 어색하다. 그게 그렇게 어려울까? 


여기서 문제는 진행자가 인식하고 있는 프로그램의 목적과 대상이다. 방송 내용은 방송사가 시청자에게 공급하는 상품이다. 방송사가 상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관련된 사람들끼리의 예절은 그 상품에 포함시킬 필요가 없다.  


그렇지 않고 뉴스를 진행자 중심의 퍼포먼스로 착각하면 마치 영화 촬영 한 편 끝낸 배우처럼 우쭐해서 뒤에서 수고한 스태프들에게도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어 진다. 뉴스는 화면에 나오는 진행자가 공연하는 프로가 아닌 여러 사람의 합작품이다. 자기들끼리 고마워하는 건 좋지만 그것을 과장해서 시청자에게까지 보일 건 없다. 회사에서 직원 간에, 부서 간에 일상적인 업무 협조할 때마다 서로 허리 굽혀 인사하지 않는다. 필요시 말로 하면 된다. 출연자가 정작 인사를 할 대상은 시청자뿐이다. 여기에서도 압존법이 적용된다. 





필자가 근무하던 회사에 들어온 신입사원 ㅅ 은 아침에 출근하면 언제나 사무실을 돌면서 활기차게 인사를 건넸다. 그래서 나는 ㅅ 따라 하기 운동을 제안했다. 누구든지 회사에 나오면 동료들에게 다가가서 큰소리로 인사하기였다. 아침에 한 사람 한 사람 인사를 건네다 보면 인사로 끝나지 않는다. 평소 서로 서먹했던 동료 간에 말이 트이고, 어제 부탁받은 업무 협조가 늦어지는 이유에 대해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어진다. 수평 소통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이 운동은 필자가 퇴직하고 나서 흐지부지 되었다고 한다. 반 강제로 시작한 '문화혁명'의 수명은 짧았다. 


브런치 작가 '공감의 기술'님  https://brunch.co.kr/@happyguy98  이 11월 29일 자로 올린 글 '먼저 인사하기 소통의 시작입니다'는 매우 시의 적절하다. 아무나 먼저 본 사람이 건네고, 미소로 화답하는 인사가 이웃을 만드는 첫걸음이다. 전투도 선제공격이 유리하다. 인사는 모르는 사람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불필요한 경계를 해제하고 소통 범위를 넓히는 현명한 사회 활동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사말이 편해져야 한다. 우리의 인사말은 아직 불편하다


불편하면 말하기 싫어진다.


하기 싫은 말은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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