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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무에 투입되자마자 세가지 트러블에 직면한 나는 나름의 대책을 짜내야 했다.
먼저 현장 베테랑들 앞에 선 신입 담당자 문제.
이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들 앞에서 담당자로서 당당하려면, 하루빨리 일을 배워 최소한의 역량을 길러야 했다. 이를 위해 나는 거의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하루 6~7시간을 현장에 머물며 일이 돌아가는 원리와 노하우를 배웠고, 현장 워커들과 관계를 쌓았다. 동시에 마리오를 비롯한 선임들에게 적극적으로 달라붙어 담당자로서 가져야 할 역량과 역할을 사사받았다.
그렇게 현장에서의 요령을 익혔다면 이제 내실을 키울 때였다. 가진 것 하나 없는 내가 발주처와담당 협력업체의 잔뼈 굵은 베테랑들에 맞설 무기는 계약서와 설계 도면이 전부임을 알기에, 퇴근 후 캠프숙소에서 따로 공부했다. 그렇게 계약 조항과 도면의 수치 하나까지 외워 대응하니 현장 베테랑들의 벽도 한결 누그려져, 차츰 눈빛에 인정의 빛이 돌기 시작했다.
다음은 마리오 문제.
아쉬운 쪽인 내가 취해야 할 전략은 명백했다. 먼저 관계 형성하기.
현장 업무에 특화 된 글로벌 스텝들은 보통 사무 업무에 취약한 특징을 가진다. 특히 행정적인 절차나 전산 처리 업무는 매우 어색해하고 꺼리기 마련이다. 나는 우선 이런 니즈를 해결해 주었다.
관리팀에서 자잘한 비품 챙겨주기부터 보고 및 업무 연락까지. 현장 관리 업무를 제외한 부수적인 업무를 도맡아 챙겨주었더니 바로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함께 현장을 돌아다닐 때면 적극적인 리액션을 통해 친분을 다졌다. 자랑하길 좋아하는 마리오의 영웅담을 듣고 1.5배로 반응하며 꼬리 질문을 이어가니, 더욱 신난 그는 봇물 터지듯 이야기를 쏟아냈다.
인위적인 리액션을 더하긴 했지만, 사실 그의 이야기는 꽤 재미있었다. 인도의 문화부터 교육 환경, 건설 현장 에피소드 같은 이야기들은 나의 호기심 충족에도 적절했으며, 마리오라는 사람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Mr. Han, 너한테만 말하는 비밀인데’ 라고 운을 떼며 시작한 복작복작 개인 가정사까지 들었을 땐 정말 마음으로 통하는 느낌이 들었고, 잠시나마 그의 짜증마저 귀여워보이는 기적을 경험했다. (물론 후에 다른 팀원들도 다 알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렇게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니 업무 협조도 수월했다. 이후 현장을 돌며 내가 묻지도 않은 개인적 노하우를 스스로 꺼내주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가끔 뜬금없이 툴툴거리며 끝내 대답을 피하는 질문들이 있었는데, 이는 평소의 투정과 다른 느낌으로 처음엔 나도 어리둥절했다. 이후 점차 현장일이 익숙해지고 일이 돌아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 툴툴거림의 정체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건 그냥 마리오도 몰랐던 것이다.
처음에는 20여년 경력의 베테랑도 현장 일을 모를 수 있구나 의아했지만, 놀랍게도 그는 모르는 것이 굉장히 많았다. 동시에 마리오는 협력업체 및 유관부서와의 마찰이 잦았다. 처음엔 그저 성격이라 생각했지만,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마리오 옆에서 시간이 들여 깨달은 것은 건설 현장 엔지니어의 유형이 나뉜다는 것이다.
건설 현장의 메인 작업 중, 무거운 자재를 상부로 옮기기 위한 크레인 양중작업이 있다. 크레인이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넘어간다면 이는 인명피해가 날 수 있는 심각한 중대 재해로, 작업 전 크레인 용량, 작업 반경, 지반 상태 등이 포함 된 양중 계획을 꼼꼼히 세워야 한다. 양중할 자재의 무게가 기준치 이상이면, 발주처가 입회한 양중 계획 미팅에서 승인을 받아야 할 정도로 민감한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 건설 현장에서 모든 변수를 고려한 완벽한 계획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 현장 내에서 십여가지 공정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데다 타이트한 공기, 불가항력적 변수(기후, 현지 문화 등), 돌발 트러블과 같은 이슈가 버무려져, 현장 컨디션이 시시각각 바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건설 규정을 완벽히 FM으로 따르기 보다, 유연한 의사결정과 조율 능력이 베테랑 건설인의 중요한 역량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선이 굉장히 모호하고 주관적이라, 규정을 무시하는 트러블 메이커와 현장 장악력이 우수한 베테랑은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이다.
이러한 생태 속에서 마리오는 결과로 증명하려는 저돌적 건설쟁이로 커리어를 쌓았고, 그와 같이 현장에 특화 된 이들 중에는 이론적 베이스가 부족한 케이스가 많았다. 그들의 무기는 오로지 경험으로, 자기가 해본 일에는 굉장한 효율을 자랑한다.
실제로 마리오는 현장 워커 컨트롤이나 돌발 트러블 해결 능력이 탁월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을 한 꺼풀 벗겨 보면, 과정이 우악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본인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결과를 위해 과거의 경험을 그대로 가져오려 하다 보니, 새로운 상황이나 규정을 무시해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규정 및 절차에 대한 솔루션과 이론적 대안이 포함되야 하는 작업 계획을 경시했고, 이로 인해 협력업체 및 유관부서와의 마찰이 잦았다.
그리고 이는 온전히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일도 배울 겸, 마리오가 현장일로 바쁘니까 나라도 해야지’ 라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수습했다. 하지만 똥을 싼 사람과 치우는 사람이 다른 상황이 반복되고, 이것이 당연시 되는 분위기로 흘러가자 ‘이건 아닌데’ 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결국 내가 터져버렸다.
그날도 평소와 같이 크레인 양중작업이 있었다. 양중계획 승인도 났고, 유관 시공부서와의 협의도 끝나 작업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작업 준비를 위해 나간 현장에는 그새 타 부서로 인해 땅이 파여져 있었고, 그 위치가 크레인 세팅 위치와 애매하게 걸쳐 있었다. FM대로 하자면 땅을 판 부서와 다시 협의를 거쳐 땅을 메우고 지반 안정도가 확보된 이후 크레인 작업에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마리오는 ‘할 수 있다. 나만 믿어라!’ 라며 작업을 강행하려 했다. 공사가 지연되면 불필요한 경비가 들어가기 때문에 협력업체 소장 역시 작업 강행을 택했고, 내가 유관 부서들과 협의하기 위해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사이 작업은 시작되었다.
다행히 양중작업은 사고 없이 끝났다. 하지만 작업 막바지에 안전팀 직원에게 현장을 들켰고, 이는 안전 팀장의 귀에 들어가 ‘다혈질 로지컬 몬스터’까지 이어졌다.
당연히 책임 추궁의 시간이 돌아왔고, 공식적 해당 작업의 담당자인 나는 팀장과 안전팀을 돌아가며 영혼까지 탈탈 털렸다. 그 즈음 여러 문제가 겹쳐 마음의 여유가 바닥나 있던 나는 폭발했고, 결국 마리오와 언성까지 높인 싸움으로 번졌다.
여기서 신비한 건설 공사판의 공식이 하나 있다.
이는 바로 ‘한번 격하게 싸운 이와 더욱 돈독해진다’
물론 싸움의 상대와 이유에 따라 다르겠지만, 경험상 한번 격한 감정 표출이 있고 난 이후에는 그 상대와의 협업이 더욱 원활해졌다. 이는 터프한 공사판 작업자들간의 인정과 같은 것으로, ‘얘가 그래도 강단이 있는 놈이구나’ 라는 느낌이다.
실제로 난 마리오 뿐 아니라 담당 협력업체의 소장, 파견 이사, 공사 과장들과 본의 아니게 한번씩 격한 푸닥거리를 거쳤고, 이후 그들의 눈에서 ‘만만한 신입’의 기운이 많이 옅어짐을 보았다. 그때마다 팀장의 쌈닭병이 옮음을 느껴 자괴감이 들곤 했지만, 결과적으로 업무의 효율을 높여주었으니 이는 필요악이라 치부해야 할까. 건설판의 아이러니 중 하나라 해두겠다.
마리오와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감정적 싸움 이후, 우리 사이에도 미묘한 관계 재정립이 이루어졌다.
물론 마리오의 업무 방식에 변함은 없었고, 그의 수습역은 자연스럽게 나의 책무 중 하나로 굳어졌다. 다만 달라진 점이라면, 마리오가 일을 진행함에 있어 나와의 의견 조율에 더욱 신중해졌고, 나 또한 마리오의 그런 성향을 인정하고 맞추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후 퇴사까지 마리오와 나는 다이나믹한 현장 롤러코스터의 동반자로 쭉 함께했다.
이제 마지막 문제인 팀장.
사실 애초의 걱정과는 다르게 나와 팀장과의 관계는 굉장히 우호적이었다.
우선 (다행히도) 팀장이 나를 맘에 들어했다. ‘한기사(건설업에서는 신입사원을 기사라 칭하기도 한다)는 똘똘하고 빠릿해서 좋아’ 팀장이 내게 했던 말이다.
혹여 내가 한 일이 팀에 누가 될까, 혹여 팀장의 심기를 건드릴까, 한껏 긴장한 나는 현장에 임하자마자 매사에 적극적으로 뛰어다녔고, 이는 팀장을 포함한 주위 선임들로 하여금 ‘정말 열심인 신입사원’ 이란 평을 자아냈다.
건설 현장에서는 위급사태로 오해를 살 수 있는데다, 사고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뛰는 것을 금지한다. 현장 사무실 역시 좁은 통로인데다 타 부서의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뛰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정신차리면 어느새 뛰고 있었고, 처음엔 이를 지적하며 혼내던 선임들도 나중에는 ‘또 한기사 지나가네’ 라며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팀장의 가르침에 따라, 나는 개인적 업무보다 유관부서의 요청을 우선적으로 처리했다.
이는 유관부서와의 실시간 협업이 핵심인 건설현장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지키기에는 쉽지 않은 지침이다. 그래도 팀장의 지침인 만큼 난 우선순위의 상부에 항상 요청사항을 먼저 두어 처리했고, 이는 유관부서 선임들의 우호적 평가로 돌아왔다.
역시 백마디 말보다 우직한 행동이 효과적이었다. 이런 평들이 모여 나의 이미지를 만들었고, 그 이미지를 팀장이 꽤나 흡족해 했다.
동시에 나도 후임의 입장에서 팀장을 진심으로 인정했다.
물론 ‘다혈질 로지컬 몬스터’의 쌈닭 기질로 인한 각종 외부 트러블과, 가끔 터지는 짜증 범벅의 논리 폭격에, ‘와… 진짜 싫다’ 라 되뇌인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꽤 나쁘지 않은 팀장이었다.
우선 그는 솔선수범형 팀장이었다.
직접 담당자는 아니지만 6개의 업체를 관리하고, 8명의 팀원을 이끌며 기계설치팀 공정을 총괄하는 것은, 신입인 내 눈으로 봐도 기가 막힌 업무량이었다. 너무도 많은 업무량으로 인해 해당 담당자 몫으로 넘어오는 양 또한 비례해서 많아졌던 것이지, 팀장의 업무는 팀원들의 그것과 사이즈를 달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장은 세세한 디테일까지 직접 챙기려 했고, 그만큼 왕성한 행동력을 자랑했다. 때문에 어떤 팀원보다도 야근 및 휴일 근무를 많이 뛰었는데, 와중에 팀원들의 휴일 근무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분배하려 노력했다.
세세한 디테일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챙기며 팀원들을 쪼아대고,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휴가를 먼저 몰아씀으로 몇몇 불만 여론 또한 드셌지만, 사실 내 눈으로 보기에는 현장에 그만큼 합리적이며 제 할 일 하는 매니저급은 드물었다.
동시에 그는 나름의 정과 배려도 있었다.
술과 노는 것을 좋아해 회식 자리를 선호함에도, 현장일로 피폐한 팀원들을 배려해 그러한 자리를 가능한 줄였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또한 회식을 하더라도 각자의 자율성을 존중해, 절대 술이나 2~3차 강요가 없었다.
첫 팀 회식에서 긴장한 나는 분위기를 맞춰야 한다는 사명감에 주량을 넘어선 무리를 했다. 리미트에 차오름이 느껴지면 몰래 화장실로 빠져나가 리셋하고 돌아와서 다시 시작했고, 모두가 흥에 겨워 이어진 노래방에선 안치환의 ‘사랑은 꽃보다 아름다워’ 를 부르며 세대간 화합을 도모했다.
이러한 첫 경험의 화려한 전적 때문에 나의 주량을 오해한 팀장은 이후 자리마다 나를 찾았고, 비슷한 양상의 술자리가 몇차례 더 이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지나 나의 실제 주량과 실은 소주가 아닌 맥주파였음이 밝혀졌고, 팀장은 ‘진작 말을 하지’ 라며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또 한번은, 관리팀에서 받은 팀 회식비를 나를 포함한 한국인 직원 셋에 주며 주니어 직원을 위로하는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글로벌 스텝도, 팀장도 없는 팀 회식에 고삐가 풀려버린 우리는 (가격이 싸지도 않은, 현장 근처 하나 밖에 없던 한국식당에서) 정말 미친듯이 먹고 마셨고, 종류별 안주와 소주, 맥주, 그리고 복분자주의 콜라보로 30만원 전액 소비를 달성했다.
홧김에 일은 저질렀지만, 계산을 하려고 보니 위기감이 차올랐다. 뒤늦게 당황한 우리는 갈등했다. 전액 청구를 시도해 볼 것인가, 아님 사비로 보충해 액수를 조금이라도 줄여 볼 것인가.
취한 와중에도 초조해 하는 선임들을 대신해 나는 신입의 패기를 보이겠다며 총대를 매기로 했고, 다음날 숙취로 괴로워하며 조심스레 영수증을 건내는 나와 선임들을 본 팀장은 기가 막혀 했다. 하지만 이내 “대단하다 니네 진짜… 다음부터는 적당히 해” 라는 한 마디로 상황을 끝냈고, 직접 관리팀에 해명 아닌 해명까지 해주었다.
정말이지 굉장한 감동이었다.
현장 생활을 하며, 나와 팀장을 아는 모든 선임이 ‘버틸만 하냐, 괜찮냐’ 며 걱정했지만, 사실 나는 그와의 합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그가 살아온 성향과 성격으로 인해 업무 스타일이 쌈닭으로 굳어진 것이지, 자신의 위치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그 부분을 받아들이고 맞추고 나니, 일을 되게 하려는 의지가 뜨겁고 나름 합리적이려 노력하는 모습의 팀장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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