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계속)
당장 내가 속한 기기설치 팀에만 인도인 둘 필리핀인 둘, 총 4명의 3국 스텝이 있었고, 현장 전체 직원의 약 30~40퍼센트 가량이 글로벌 스텝이었다.
그 중 한 인도인이 나의 사수였다. 그것도 현장 경력만 근 20여년인, 프라이드 충만한 40대 인도 아저씨. 동글동글 건강하게 까무잡잡한 얼굴에 풍성한 까만 곱슬머리, 탐스런 D자 라인을 가진 그는 나와 현장 생활 전반을 함께 한 영혼의 메이트이다. 빨간 티셔츠에 파란 멜빵 바지를 대입하면 영락없는 게임 캐릭터. 이하 마리오라 칭하자.
일찍이 유럽 여행에 미국 어학연수도 경험하며 타 인종과 문화에 열려 있다 자부하던 나였다. 또한 네츄럴 본 뻔뻔 영어 유저로서, 정교하진 않지만 어떻게든 영어로 의사소통은 해내던 나였다.
하지만 마리오는 인생 역대급 강적이었다. 분명 대학 학부시절 인도인 교수의 수업을 꾸역꾸역 들으며 인도 영어 발음에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마리오의 그것은 차원을 달리했다. 처음에는 착실하게 ‘excuse me?’를 붙여가며 놓친 말을 되물었지만, 그것도 차츰 지쳐갔다.
나와 마리오와의 대화는 대략 이런식이다.
마리오 : (신나서) “불라불라불라블라쏼라”
나 : (미안한 듯 눈치보며) “어.. 미안 네 말을 놓쳤나봐, 이해가 안되네. 다시 한번 말해주겠어?”
마리오 : (매우 놀라서) “왓? 왜 이해를 못하지? 내 영어는 전통 미국 영어라고! Mr. Han, 너 그거 알아? 블라블라블라불라쏼라...”
나 : (듣다 지쳐) “오... 그래 알았어, 그러니까 방금 뭐라고 했더라?”
마리오 : (딱하다는 눈빛으로) “오 이런 불쌍한 친구. ‘블라블라’ 라고 했어”
나 : (멀뚱멀뚱) ???
마리오 : (더욱 놀라며) “ ’블라블라’ 라고!”
나 : (의심스럽다는 듯) “그거 영어 맞지?”
마리오 : (역정을 내며) “ ‘블라블라’!! 내 영어는 전통 미국 영어라고!!”
놓친 단어를 부연 설명을 통해 이해시키려는 노력은 마리오에게 탑재되어 있지 않은 기능이다. 발음과 문법 전반이 자유롭지만, 미국 전통 영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그는 자신의 영어가 보통과 다를 수 있다는 가정을 애초에 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스탠다드를 나에게 주입시켜 나를 갱생시켜야 하는 사명을 가진 듯 했다.
그렇게 ‘맞춰 볼테면 맞춰봐라’라는 느낌으로 스무고개 하듯 서로의 단어 알아 맞추기는 계속되었고, 점차 그것이 우리의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이후 나는 그의 영어를 문맥상으로 이해하는 요령을 터득했다. 그리고 한 달여 가량을 들여 점차 마리오식 영어 마스터로 거듭났다.
그렇게 마리오식 영어 전문가의 반열에 오른 나였지만 끝내 맞추지 못한 단어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Schedule’.
보통 미국식 영어를 공부한 이들이라면 ‘스케쥴’이라 발음하고, 영국식이라도 ‘쉐듀울’ 정도의 느낌이다. 하지만 마리오식 영어로는 ‘셰류(어미에 짧고 강한 악센트)’였다.
정말 놀라웠다.
정체를 추측 할 문맥조차 없는 ‘show me schedule’이란 문장 앞에 나는 버벅였고, 그 반응에 놀라 연신 셰류셰류만 외쳐대던 마리오도 지쳐 결국 우린 종이를 꺼내들었다.
그렇게 언어 문제는 가닥이 잡혔지만, 가장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다른 인도인 스텝을 통해 들은 이야기인데, 마리오가 ‘Mr. Han에게 아는 것을 다 가르쳐 주지 마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유인즉슨 그렇게 현장 지식과 노하우를 다 알려줘 버리면 자신들이 설 자리를 잃는다는 것이었다.
충분히 이해는 된다. 몇 십년 경력의 베테랑 엔지니어지만 3국 출신 계약직이란 이유만으로 그들이 받는 불이익은 내가 봐도 억울했다. 당장 그들의 급여가 신입인 나와 비슷했으니까. 이것은 시스템적인 문제였지만, 그들이 느낄 상대적 박탈감은 충분히 공감이 되었다.
하지만 당장 담당 엔지니어로서 현장에 투입된 맑은 아이에게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기기설치를 담당한 엔지니어는 나와 마리오 둘 뿐이었고, 팀장은 첫날부터 나의 적응과 교육 전반을 마리오에게 전담했기 때문에 내가 잡을 동아줄은 이 배불뚝이 아저씨뿐이었다. 내 앞에서는 “Mr. Han, 모르는 것은 뭐든 물어봐. 내가 다 알려줄께. 나만 믿어!” 라며 만면에 미소를 짓는 마리오를 앞에 두고, 그에 특화 된 솔루션이 시급했다.
다른 마지막 문제는 바로 팀장이었다.
사실 팀장은 본사 교육 때부터 명성이 자자했다. 교육에 들어온 선배들은 하나같이 말레이시아 현장 발령자를 찾았고, 기기설치팀에 배치 받은 나를 보며 만면에 동정의 빛을 아낌없이 띄웠다.
그 중 팀장 밑에서 일했었던 한 선배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전해들은 그의 영웅담은 굉장했다. 그로 인해 퇴사한 신입사원이 총 셋에, 발주처 앞에서 하이바(안전모)를 던지며 육두문자를 구사했다는 전설, 똑똑한 쌈닭이라 사방이 적이라는 특성까지.
‘잘 버텨라. 술 땡기면 언제든지 연락하고’ 라며 어깨를 두드리는 선배를 보며 심란함이 차올랐지만, 이내 깨달았다. 이는 천재지변에 준하는, 걱정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는 문제임을.
현장에 오고, 팀장의 첫 인상은 의외로 깔끔했다. 40대임에도 준수한 외모에 중저음의 목소리, 인텔리한 화법 및 상당한 영어 구사능력. 심지어 같은 대학 과선배라는 이야기를 듣고 은연중에 동질감마저 들었다. 그렇게 팀장을 나의 사수로서 세팅하고 마음의 설정치를 맞추고 있는데, 그는 친절하게도 첫 날부터 못 박았다.
“나는 지금 기계 업체만 6개나 맡고 있어서 널 케어해줄 여력이 없다. 그러니 넌 마리오를 따라다니면서 배우도록 해라. 인도 출신 3국 스텝이지만 경력 지긋한 베테랑 엔지니어니까 빼먹을게 많을거다. 모든건 너 하기 나름이니까 적극적으로 들이대도록”
그렇게 나의 사수를 마리오로 공식 선언하더니 한 가지 미션을 덧붙였다.
“내가 너 한달 안에 사람 만든다. 각오해”
이 말을 현명한 신입 입장에서 번역해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너 챙겨줄건 아니지만, 한달 안에 쓸만해져야 할꺼야. 물론 기준은 내 성에 찰 때까지지. 각오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관계적 경험이 쌓이며 그의 윤곽은 뚜렷해졌고, 나홀로 정의 내린 팀장의 이미지는 이렇다.
‘다혈질 로지컬 몬스터’
그는 예상보다 더 똑똑했고, 생각보다 자주 폭발했으며, 상상을 뛰어넘는 쌈닭이었다.
‘왜 일을 이렇게 밖에 못하지?’라는 오로라를 온 몸으로 뿜어내며 현장 직원 중 소장(현장대빵)을 제외한 모든 이를 대상으로 충돌했다. 자신보다 높은 직책의 사람에게는 짜증 곁들인 논리 폭격을, 직책이 낮은 사람에겐 논리가 가미된 순도 100% 짜증 폭격을 흩뿌리고 다니던 그의 모습은 ‘쌈닭’의 바이블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대외적 요령과 넉살이 좋아, 업무 연관성이 떨어지는 부서의 직원들에게는 굉장히 좋은 평을 받았다. ‘과장님 너무 좋지 않아요? 똑똑한데다 유머감각에 준수하기까지. 거기다 어쩜 목소리까지 좋아’ 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묘한 기분에 그저 미소지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현장을 떠나기 전까지 납득이 되지 않던 팀장의 악행 베스트는 한 직원을 향한 악의적인 인신공격이었다.
그 직원은 우리 기계설치팀의 일원으로, 나와 업무 영역만 다른 한국인 직속 선배였다. 프로젝트 초기멤버로서 일찍이 현장 생활을 시작한 그는 본래 다른 팀장 밑에서 일을 배웠다. 하지만 그 팀장이 어떤 사유로 인해 좌천되고, 그 빈자리를 현 팀장이 채운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은 처음부터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팀장과 선배의 가장 큰 비극은, 너무도 다른 성향과 업무 스타일이었다.
‘다혈질 로지컬 몬스터’인 팀장은 건설 현장에 특화 된 ‘노가다꾼’으로서 빠르고 적극적인 일처리를 중시했지만, 선배는 섬세하고 꼼꼼했다. 사실 선배가 지나치게 꼼꼼하긴 했다. 이는 다양한 공정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실시간 의사결정이 중요한 건설 현장의 담당 엔지니어로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실제로 선배는 서류 작업부터 공정 관리까지 자잘한 트러블을 잦게 만들어 팀장의 분노를 자아냈다. 선배 또한 스스로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본래 그런 성격이라 어쩔 수 없다 했다.
그렇게 팀장과 선배는 성격부터 업무 처리 방식까지 사사건건 부딧혔고, 내가 현장에 왔을 땐 이미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태였다.
팀장은 모든 팀원들이 보는 앞에서 선배를 깎아 내렸고, 선배는 그런 팀장을 그저 묵묵히 견뎌내고 있었다.
아침 팀 미팅이 끝나면 팀장과 선배가 회의실에 단둘이 남아 한 시간 가량의 추가 언어폭력이 이어졌고, 현장에 나갔다 들어오면 안쪽 구석 팀장 자리에 선배를 불러 앉혀두고 조용히 린치를 가하고 있는 팀장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팀을 관리하고 공기를 맞춰야 하는 팀장 입장에서 업무적으로 성에 차지 않는 선배가 맘에 들지 않을 수는 있지만, 개인적인 감정까지 섞어가며 인신공격을 하는 그 행태는 옆에서 보기 괴로웠다.
나와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운 선배였기에 ‘선배는 그걸 어떻게 그냥 버텨요? 그냥 팀장이 원하는 대로 조금만 맞춰주는게 좋지 않아요?’ 라며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지만, 그 갈등은 내가 현장을 떠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퇴사 이후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결국 참다못한 선배는 본사에 팀장을 고발했고, 팀장은 얼마 못가 강제 본사 복귀에 휴직을 권고 당했다. 그리고 선배는 회사를 때려치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외에도 팀장에 얽힌 이야기가 많지만 우선은 이정도로 해두자. 중요한건 맑디 맑은 신입사원이 마주친 팀장이 이러한 성향을 가졌다는 것이니까.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