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의 재해석
오물을 없앤다. 더러움을 닦아낸다. 지저분함을 씻어낸다. 불결하니까, 혐오스러우니까, 불쾌하니까, 역겨우니까, 세균 덩어리 같으니까, 그것을 만지면 왠지 아파질 것 같다. 피하고 싶다.
욕실화에 물이 고여 있으며 썩은 물 같다. 더러운 저것을 밟아야 할까. 아이들도 그런 생각인 것일까. 욕실화와 닿는 면적을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발바닥을 최대한 웅크린다. 신발은 한 짝만 사용한다. 깨금발로 선다. 신발에 발을 끼워 넣지 않고 위에서 아래로 우악스럽게 욕실화를 지르밟는다. 때로는 한 짝의 신발을 두 발로 지저 밟는다. 물이 절대 고이지 않는 욕실화의 겉면 가장 높은 곳, 산의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부터 발을 디딘다. 커다란 두 발이 욕실화 하나에 가득 찬다. 한 발 위에 다른 한 발을 올리고 엉거주춤 세면대를 붙잡고 서기도 한다. 그런다고 고인 물이 안 묻을까. 그런데 조금이라도 칙칙한 더러움을 피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인가 보다. 나는 때로 양말 신은 내 발을 젖은 욕실화에 구겨 넣기도 한다. 양말 덕분에 반나절 묵은 고인 물의 더러움을 조금은 피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욕실 바닥은 자주 미끈거린다. 구석에 뭉근하게 그을린 것 같은 물때는 늘 마음을 무겁게 한다. 박박 닦아버리고 싶다. 그러나 불결함을 마주하고 가까이 다가가 바닥 솔로 문지르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내 깨끗한 손과 신선한 공기를 마셔야 하는 콧구멍과 아름다운 것만 보여줘야 하는 눈에게 더러움을 직면할 용기를 불어넣어 줘야 한다. 바닥 솔은 빳빳하다. 칫솔이 아기라면 바닥 솔은 거뭇한 수염이 빽빽하게 올라오는 건장한 청년 같다. 바닥 솔은 물기가 묻어있지도 않은데 나는 지난 솔질의 기억을 되새기며 더러움을 입힌다. 바닥 솔도 왠지 지저분한 것 같다. 맨손으로 들기가 머뭇거려진다. 그래서 보통 바닥 솔질을 할 때면 팔목을 넘어 거의 팔꿈치까지 올라오는 긴 고무장갑을 낀다. 이제 샤워기 물을 틀고 미끈 거리는 바닥을 문지른다. 눌어붙은 물때는... 뭘 뿌려야 하는데... 그 옆에 누런 줄눈도 함께 눈에 밟힌다. 미루고 미루는 넓은 바닥과 벽면, 곧바르게 달리는 하얀 줄눈. 수도꼭지, 거울을 닦으면서도 모든 공간을 아우르는 타일의 더러움이 나를 짓누른다.
욕실 타일 사이사이에 낀 하얀 줄눈, 줄눈 사이 누런 때, 갈색 때는 한동안 손을 놓고 있으면 차츰 거무스름한 색으로 변한다. 바닥 솔로 대충 문지르면 없어지는 물때와는 달리 줄눈 사이의 때는 쌓이고 쌓인다. 욕실 귀퉁이 직선 세 개가 모여 하나의 점이 되는 곳을 나는 혐오한다. 더욱 쉽게 빠르게 색이 변하는 곳도 있다. 물이 흐르지 않는 벽타일 사이의 어느 지점, 바닥 솔로도 문지르지 않고 손이 잘 안 가는 곳이다. 무심히 지나치다 어느 날 보면 거뭇한 곰팡이가 생겨있다. 곰팡이를 없애는 거품 세제를 뿌리고 바로 제거하면 좋겠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다. 락스가 들어간 그 세제를 뿌리면 내 코가 그걸 다 마신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걸 매일 마시면 내 허파에 락스로 가득 차는 건 아닐까? 그건 그냥 핑계일 뿐이고 그저 더러움을 피하고 청소하기 귀찮아서 그렇다.
타일 줄눈 사이에 끼는 지독한 때. 남아있는 오물, 다시 생기는 더러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말라붙은 땟자국, 소리 없이 쌓이는 축축한 먼지, 물기와 엉겨 붙은 온갖 지저분한 것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정말이지 미련스럽게 들러붙고 매달린다. 미련한 것들. 생명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은 삶에 대한 강한 집착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 같다. 그리고 소멸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더러움은 누구보다 근면하고 성실하고 끈질기다. 더러움이 가진 존재의 억척스러움을 뛰어넘기 위해 나는 더러움 보다 더욱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끈기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나는 아침 출근 준비를 하며 칫솔을 입에 물고 욕실 타일 줄눈에 거품이 부글거리는 락스를 뿌렸다. 욕실 전체는 너무 넓었다. 그래서 바닥의 4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넓이에 칙칙칙 하얀 거품을 뿌렸다. 얼굴에 물을 끼얹으며 세수를 하는 동안, 타일 줄눈에 침투한 더러움이 불어나기를 기다렸다. 독한 락스 냄새가 코를 마구 후벼파는 것 같았다. 허파까지 도달해 금세 락스가 절여진 숨이 온몸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아차, 바빠서 환풍기 켜는 것을 깜빡했다. 환풍기를 켰다. 마스크도 쓸 것을 그랬다. 왜 바쁠 땐 그런 생각이 안 나는 걸까. 마침내 수건으로 손과 얼굴의 물기를 닦아낸 후 고무장갑을 꼈다. 바닥 솔을 쥐고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타일을 문지르고 틈새 솔을 꺼내 줄눈도 문질렀다.
직선 셋이 모여 점을 이루는 귀퉁이 구석에는 솔이 안 닿았다. 그동안 너무 열심히 문질렀는지, 머리 부분이 꺾여 있다. 더러움은 빳빳한 솔도 꺾어버리는 놀라운 힘이 있다. 나만 더러움 앞에서 주눅 드는 게 아니었다. 꺾인 틈새 솔의 머리를 보며 더러움의 강인함을 선명하게 느꼈다. 몇 번의 솔질로 간신히 구석구석 흰 줄을 만들었다. 샤워기로 물을 뿌리고 스퀴지로 물을 훔쳐냈다. 스퀴지는 줄눈에는 닿지 않았다. 줄눈은 왜 자꾸 깊어지는 것 같을까. 내가 자꾸 솔질을 해서 그런 걸까. 나이가 들면 깊어지는 주름처럼 줄눈의 주름살 사이로 마른 천을 비집어 넣어 물기를 닦아줘야 했을까. 드라이기로 일일이 물기를 말려주면 참 좋을 텐데. 바쁜 아침 시간에 그럴 겨를이 있을 리가. 물을 쏙쏙 흡수하는 마른 천을 준비해 욕실 수납장에 쌓아놓기로 마음먹었다.
더러움은 대단하다. 내가 손을 걷어붙이고 제거의 칼날을 휘둘러도 도망갈 구석, 재도약의 발판을 어느 틈에 마련해 놓았다. 내가 시간이 없어, 미처 생각지 못해, 물기 축축한 줄눈 틈새로 스며든 존재의 가능성을 부여잡고 더러움은 새록새록 부푼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꿈꾸는 자를 소멸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게 맞는 걸까? 꿈꾸는 자의 미래를 짓밟다니... 절대 청소하기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다. 그저 그럴 수도 있다는 얘기다.
더러움을 제거하기 위해 더러움이라는 존재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과감히 떨쳐내야 한다. 나는 냉정한 이성을 가진 강인한 사람이다. 나는 강력한 세제와 문지르는 도구로 무장했다. 나는 끈기 있게 재생되는 더러움을 이기는 사람이다. 더러움을 넘어서는 사람, 그건 더 더럽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나는 진정 깨끗함을 추구한다.
더러움은 매일 재탄생한다. 그리고 나의 욕실은 매일 깨끗함으로 재단장한다. 더러움과 깨끗함이란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평생 동안 주거니 받거니 하며 알콩달콩 함께, 한 지붕 아래서 살아가는 것인지도. 죽자고 싸우지 말자. 강력한 세정제, 강력한 것을 뿌려대고 발라대다 한순간에 훅 쓰러질 수도 있다. 평생의 과업으로 생각하고 설렁설렁하자. 왠지 더러움의 끈기에 약간 설득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더러움은 강하다. 그 강인함이 때로는 좀 멋지다. 그리고 매우 더럽다. 더러운 게 뭐 어떤가. 장갑을 끼고 치우면 된다. 냄새가 심하다면... 코를 좀 막고 치우면 된다.
더러운가? 깨끗한가? 닦은 부분은 좀 깨끗하다. 그저 나는 욕실의 아주 작은 부분을 청소했을 뿐이다. 그 외 모든 곳에 더러움이 쌓이고 있다. 그걸 다 어쩌지? 그걸 다 이고 지고 청소할 생각일랑 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그러다 청소만 하다 늙어 죽을 지도 모른다. 그저 조금 닦고, 문지른 곳을 보며 만족하며 살밖에. 숲을 보아야 할 때가 있고, 나무를 봐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나의 일상이라는 청소의 세계에서 오늘은 나무를 보며 만족하자.
내가 약한 것이 아니라 더러움이 너무 강력해서 그렇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며 살아야 내가 살 수 있다. 청소란 더러움과 깨끗함 사이에서 적당한 타협점을 찾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하지만 절대 청소를 대충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다.
*주의 : 락스는 유독 물질이다. 흡입하면 안 된다. 환기, 장갑, 마스크 필수!
‘살림의 기적 100일 살다 4’ <해우소>는
화장실 청소를 하자는 나와의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