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씬해지는 언어> 사부작사부작

by 눈항아리

바람이 좋다. 온도도 좋다. 눅눅하지 않고 습도도 딱이다. 이런 날 걷지 않으면 언제 걷겠는가. 들판이 나를 부른다. 나를 기다리는 장소가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차에서 내려 교문으로 막 출발하던 찰나, 5학년 달복이가 다시 차에 타려고 한다. 왜 교문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리는 것일까. 나는 배추 벌판 달리러 가야 하는데. 달복이는 배드민턴 채를 안 가지고 왔다며, 가게에 있다며 같이 갔다 오자고 했다.

”아들아, 잠시만 교문에서 기다려. 엄마가 바람과 같이 달려서 다녀올게. “

가게에 차를 주차하자 남편이 나와서 반갑게 맞아준다. 배드민턴 채만 챙겨 쌩하니 다시 차를 타니, 남편이 소리를 친다.

”올 때 맛난 거! “

‘맛난 거는 무슨, 나는 운동 갈 거라고요!’

학교 근처 골목에 차를 대고 교문으로 간다. 왜 아이들은 매일 준비물을 잊는 것일까. 나의 소중한 산책 시간이 흘러가 버리는 것은 둘째치고 아이 등교 시간에 늦을 아이가 걱정되었다. 교문에서 안 기다리고 어디 갔으면 어쩌지? 차에서 내려 걷던 걸음이 빨라지더니 이내 내 발이 뛰고 있었다. 교문까지 뛰었다. 뛰면서 생각했다. ‘나 대체 운동을 언제 하냐고!’ 맞다, 나는 틀림없이 뛰었다. 그게 운동이 아니고 뭐냐고 대체. 이제야 웃음이 난다.



교문에서 기다리는 아들 녀석에게 준비물을 건네주고 바로 배추 벌판으로 방향을 틀었다. 잠깐 뛰었더니 준비 운동이 되었는지 몸이 어서 걸으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농로를 둘러 흐르는 시멘트 도랑물을 건너 배추 벌판으로 나갔다. 이곳에는 늘 걷는 사람들이 있다. 중년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여인들은 대부분 걷고 남자들은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간다. 여인들은 대부분 햇빛을 가리기 위한 모자를 쓰고 있다. 나이 지긋한 아저씨들의 자전거에서는 커다란 음악이 울려 퍼진다.


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정도로 사람들과 가까이서 걷지 않는다. 사람은 가끔 만날 뿐 인적이 드문 편이다. 나도 한가한 들판 그 속으로 풍덩 뛰어든다. 뛰어온 심장이 빠른 걸음에 점차 제 자리를 잡아간다. 그럼 이제 걸어볼까. 한 번 나오기 참 힘들네. 나의 운동장 배추 벌판에서 출발, 파워워킹! 발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며 뱅글뱅글 파란색 빨간색 불꽃을 만들며 출발한다. 엔진이 점화되며 강력한 힘에 앞으로 마구 전진해야지. 10분 동안 힘차게!


뱃살이 빠지도록 빠르게 걸어야 하는데, 10분 걸어서 무슨 에너지 소모가 되겠는가. 애초에 살을 빼겠다고 생각했으면 10분 걸음이 아니라 100분 각오로 뛰어들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0분 걷기도 지금은 감지덕지다. 10분이 20분 되고, 30분 되고, 100분이 될지 누가 아는가.


다만 한 가지 콕 찔리는 점은 지난해에도 나는 이 들판에서 배추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10분, 20분을 걸어 다녔다는 사실이다. 나는 운동이나, 움직이는 것, 건강관리에서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지난해에는 20분을 걸었는데 지금은 10분으로 줄었으니 그 걸음이 줄어든 셈이다. 과거와의 비교, 나는 작년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를 대고, 팔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지난해보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렇다는 이유를 만들어 낸다.


아무려면 어떤가, 움직이지 않는 것보다, 방구석에 꽁꽁 숨어 있는 것보다 낫다. 한 걸음 움직이는 것에 그저 감사하며 유유자적 발걸음을 옮긴다. 사부작 발걸음에 맞춰 사부작사부작 손을 흔들어 본다.


느린 걸음 걷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를 멈추게 하는 것이 너무 많다. 들판에 나오니 더 많다.

하얗고 작은 쑥부쟁이 꽃이 피기 시작했다. 노랑 콩 꽃이 마구 피어 동글동글 굴러다니는 것 같다. 열 걸음 넘게 걸었는데 밭두렁의 노랑 콩 꽃이 발자국 옆을 따라온다. 노란 콩이 데굴데굴 내 신발에 차여 콩 밭으로 굴러간 것 같다. 밭두렁에 시멘트 구석에 떨어진 들깨 한 그루는 화초처럼 피었다. 무처럼 생긴 엄청 큰 박이 길가에 나동그라져 있다. 잎에 가려져 안 보일까 누군가 길가에 꺼내 두었나. 두런두런 풀과 호흡하며 오 분 턴(turn) 자리를 지나쳐 그냥 지난다.


배추는 아직 바닥에 납작하게 퍼드러져 있다. 배가 부르려면 한참 남았다. 일렬로 쪼르르 심어진 대파는 씩씩하다. 무너지는 밭두렁 가에 불안하게 심어진 쪽파는 다 드러난 뿌리를 땅에 지지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빨간 열매 몇 개를 달고 있는 고추는 한여름 더위에 진이 다 빠져 고달파 보인다. 키가 커서 줄을 다섯 번이나 매 놨다. 꽁꽁 묶여 감옥살이를 하는 듯 힘겨워 보인다. 밭두렁 지나 논두렁 지나 연두와 노랑의 들판이 펼쳐진다. 추수가 끝난 논도 있다. 지푸라기 누워있는 논도 있고 벌써 짚단을 부려 커다랗고 하얀 마시멜로로 변신시킨 곳도 있다.


7분 39초. 너무 많이 왔다. 5분 턴 지점에서 돌아서야 했는데 들판에 심취해 마구 걸었더니. 출근 시간 늦겠다. 그래도 하나도 안 힘들다. 내가 너무 가벼워 바람이 살짝 들어 옮겨주어 그런가.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애들은 그럴 테다. 그거 걷고 힘들면 어떡해! 그럴 땐 못 들은척하고 돌아서는 게 상책이다.


돌아간다. 내 발걸음을 들어 올려주고 부드러운 손으로 등을 살짝 밀어줬던 바람을 얼굴로 맞이할 시간이다. 산 바람을 맞는다. 환한 잿빛 구름 내려앉은 먼 산을 보며 걷는다. 삼층 건물, 학교 뒤, 높은 아파트 뒤로 준엄한 남색 빛의 산이 보인다. 작은 도시를 다 감싸 안은 듯한 산은 오늘도 상쾌한 바람을 보내 준다. 바람이 거세지자 흔들고 있던 내 팔이 신났다. 사람을 만나니 더 신났다. 모자를 쓰고 스카프를 두른 아주머니가 지나간다. 자전거를 탄 아저씨도 지나간다.


하얀 깨꽃이 사이로 나풀나풀 흰나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초록 잎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며 깨춤을 추니 꿀벌도 따라 춤을 춘다. 농부의 작은 비닐하우스 안에는 땅콩을 말려놨다. 하얀 도라지꽃, 보라색 도라지꽃이 봉긋하게 꽃봉오리를 부풀리고 있다.



이런 산책이라니, 15분 걸음을 글로 종일 썼다. 종일 걸은 것 같다. 이런 행복하고 아름다운 걸음이라니. 걸어서 날씬해지는 게 아니라 생각과 손가락 운동으로 날씬해질 것 같다.


빠르게 걷지 못해도, 뛰지 못해도, 많이 걷지 못해도, 오래 걷지 못해도 나는 사부작사부작 걷겠다. 그 걸음이 오래도록 계속되면 좋겠다. 그리고 오래도록 글로 옮길 수 있으면 좋겠다.


5년 10년 후에는 나도 다른 중년 여인들처럼 모자를 쓰고 스카프를 두르고 선글라스까지 쓰고 때로는 마스크까지 쓰고 그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노년의 내가 되어 같은 풍경을 보며 걸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때도 나는 사부작사부작 걷겠다.


사부작사부작 : 별로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행동하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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