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씬해지는 언어> 고통을 품었다

by 눈항아리

배추 벌판으로 들어서자 푸릇한 배추 비린내가 훅 풍겨왔다. 하늘이 높고 바람이 좋은데도 마음이 심란하면 고약한 것들이 감각의 끝에 먼저 다가와 노크를 한다.


어제는 푸르러서 좋다던 배추가 비릿하다니. 어제는 파란 하늘을 보고 기분 좋아 걷는다더니. 마음이 허하니 하늘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초록의 싱싱함은 되려 성숙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애송이, 비린내 나는 풋내기. 상대적으로 나는 푹 숙성되었다. 배추의 푸릇함이 눈꼴신 것이다. 질투가 일었다. 배추는 젊음을 향해 자라는데 나는...


어제 오십견 진단을 받았다. 40대에 오십견이라니. 일 년 전에 오십견은 절대 아니라던 의사가 이번엔 오십견이 확실하다고 했다. 일 년이나 지났으니 그동안 착착 진행된 것일 테다. 그동안 나는 서서히 늙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배추는 젊어서 좋겠다. 꽃을 두 개나 피운 도라지도 좋을 때다. 쑥부쟁이는 망울망울 꽃망울이 맺혔다. 아기네, 아기. 부러운 눈으로 들판을 훑으며 초록의 기운을 들이마시며 기운을 차려보았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 하곤... 벌레에게 뜯겨 잎마다 구멍이 빵빵 뚫린 콩 숲이 보였다. 노란 꽃은 안 보이고, 보라 꽃도 안 보였다. 오늘은 콩 잎이 초록이 아닌 점박이로 보이는 것이었다. 수확을 마친 빈 논이 쓸쓸하게 다가온다. 농로에 홀로 선 버드나무가 오늘따라 왜 그리도 외로워 보이는지. 따가운 햇살을 피해 나무 그늘에 잠시 멈춰 쉬었다. 돌아간다.


들판은 간 데 없고 하늘도 산도 안 보였다. 바람은 느껴지지 않았고 햇살이 뜨거웠을 뿐이다. 출발 선에서 멈춘 자전거 커플이 보였다. 자전거가 고장이 났나 보다. 자전거는 고장이 나면 가지 못한다. 내가 10분을 걷고 돌아오는데도 자전거는 제자리에 멈춰 있었다. 나는 좀 아프지만 움직이니까, 자전거보다는 조금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록도 아니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닌 바퀴 두 개 달린 아픈 자전거가 눈에 들어오다니.

마음을 닫고 있으면 그림 같은 풍경 속에 서 있어도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고통을 품고 있으면 고통스러운 세상이 보일 뿐이다.


오늘은 유독 나의 배가 불룩해 보였다. 기운이 없어서 밥맛이 없었다. 뱃살은 조금 줄지 않았을까.


진단은 진단일 뿐 흔들리지 말자. 기분 좋게 걸었던 어제도 내 팔은 아팠다. 그리고 오늘도 똑같이 아프다.


아픔과 고통을 품고서도 내가 걷는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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