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살을 빼겠다고 시작했는데 상황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뱃살 빼기는 건강해지기 위해서, 건강한 건 아프지 않은 것, 아파서 쉬었고 다시 아프지 않기 위해 움직였다. 가을바람이 좋으니 자연스럽게 들판에 나왔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엉뚱한 곳에 시선이 간다. 부자연스러운 아주머니의 구부정한 허리, 움직임이 다른 중년 남자의 팔, 웅크리며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키 작은 여자, 걷다 뒷짐을 지며 허리를 곧추세우는 동작, 느릿한 걸음으로 열심히 걷고 있는 노부인, 선글라스와 모자, 늘어진 천 마스크, 긴 장갑을 끼고 최대한 자외선을 가린 모습을 한 여인들이 보인다.
비바람을 다 막아줄 것 같은 쨍한 파란색 잠바를 입은 아주머니가 앞서가고 있었다. 반팔 옷을 입은 내 팔이 좀 서늘하긴 했다. 긴팔을 입을 걸 그랬나. 파란 잠바 아주머니는 창이 넓은 선 캡을 썼다. 흰색 에코백을 오른쪽 어깨에 멨다. 조금 걷더니 슬쩍 수풀에 쓰레기를 버렸다. 팔을 휘적이며 어깨를 펴고 허리도 펴고 걷던 분이 갑자기 허리를 굽히더니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간다. 쓰레기 버린 걸 들켜서 쑥스러운가 하였다.
큰 걸음으로 여인을 추월해 가다 쑥부쟁이 앞에 섰다. 아기자기한 하얀 꽃을 더 피워낸 쑥부쟁이가 장해서 사진을 찍어줬다. 방울방울 동글동글 알알이 맺힌 꽃봉오리마저도 예쁘다. 쑥부쟁이 덤불 사이로 올라온 도라지 꽃도 찍고, 진주알 박힌 듯 영롱한 열매를 매단 맥문동 사진도 찍어주다 보니 아주머니가 어느새 나를 지나치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에헴 에헴 기침을 하면서 느리게 발걸음을 옮겼다. 나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다시 나는 아주머니를 추월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모르는 사람과 재미난 산책이다. 한참 뒤에 날 쫓아오는 여인은 이제는 큰 소리로 말을 했다. 누구랑 전화 통화를 하는가 보았다.
팔은 여전히 서늘했다. 태양빛이 뿌예서 그렇다. 억 겹의 흐리멍덩한 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반팔, 반바지 차림의 아저씨가 맞은편에서 걸어왔다. 걷기 위해 나온 것이 확실해 보였다. 러닝화와 팔뚝에 찬 기계까지 깜장으로 깔 맞춤을 했다. 형광 연두색 모자가 확 눈에 띄는 젊은 여자가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지나갔다. 신발도 같은 색으로 눈부시게 빛났다. 나도 다음번엔 자전거를 끌고 나올까 생각했다.
아주머니 한 분이 또 팔을 흔들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모자를 쓰고 마스크로 입을 가렸다. 뒤따라오는 여인은 선글라스까지 썼다. 두 여인은 모르는 사람이 분명하다. 그런데 발걸음에 맞추어 흥겨운 음악이 몸 어디에선가 울려 퍼지는 건 똑같았다.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걸으면 발걸음이 더 가볍다. 나는 음악을 즐겨듣지는 않는다. 그런데 가끔 집에서 운동을 할 때 딸아이가 늘어지는 음악을 틀어주면 정말 기어 다니고 싶은 마음이 든다.
오늘은 근래 들어 가장 멀리 왔다. 함께 걷는 흥겨운 사람들이 있어서 그랬나.
들판을 걷는 사람 중 농부 빼고는 모두 작정을 하고 나온 사람들이다. 걷기 위해, 건강을 위해, 운동하기 위해, 몸을 위해, 산책하려고, 나처럼 뱃살을 빼려고 나온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우린 모두 모르는 사람들인데 일자로 쭉 뻗은 시멘트 길, 배추 벌판에 서서 같은 길을 가고 있다. 보는 방향은 서쪽 이거냐 동쪽이거나.
나는 여전히 뱃살을 신경 쓰고 있다. 목표를 옆에 두고 나는 걷고 있다. 열심히는 아니고 두리번거리며 사람들 구경도 하고 배추 벌판 구경도 하고 하늘 구경도 한다. 직진이 아니라도 괜찮다. 뭐 어떤가. 배추 벌판을 걷는 사람들이 모두 나처럼 뱃살 빼는 사람들이라 생각하자. 건강을 위해 걷는 건 확실해 보이니까. 같은 목표를 가진 모르는 사람들과 멀찍이 떨어져서 걷는 것이 좋았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다니거나, 과하게 햇빛을 차단하는 차림새를 한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기는 하다. 좀 이상하면 어떤가. 나는 녹음기에 입을 대고 주절주절 소곤소곤 떠들면서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