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씬해지는 언어> 지푸라기 냄새

by 눈항아리

벼 수확이 끝난 논에 지푸라기 냄새가 가득하다. 지푸라기 냄새는 흙과 마른풀을 섞어놓은 듯 구수하다. 아련한 어린 시절 고향의 시골집이 떠오르는 향이다.


볕 좋은 가을날 차를 타고 들판을 달리면 열린 창문으로 금방 수확이 끝난 논에서 지푸라기 냄새가 날아 들어온다. 가을의 향이 콧속으로 실어다 주는 들판의 풍경. 이렇게 논밭 길을 걸어 다니며 가까이에서 맡아보기는 참 오랜만이다.


어릴 때는 벼 베기를 하고 나면 볏단을 묶어 잘 말렸다. 지게를 짊어지고 낟알이 단단히 들어찬 무거운 볏단을 옮겼다. 소나무 사이에 긴 줄을 매고 볏단을 척척 걸쳐서 말렸다. 미처 걸지 못한 벼는 논두렁에 거꾸로 세워서 말렸다. 아버지는 볏단 세우기 선수였다.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긴 볏단의 줄을 만들 수 있는 건 대단한 능력 같았다. 볏짚은 푸석푸석 가을을 품고 말라갔다.


마른날을 잡아 탈곡 마당이 펼쳐졌다. 커다란 비닐과 포장을 바닥에 깔고 탈곡기를 올렸다. 기다란 고무 바로 경운기와 탈곡기를 연결했다. 경운기는 계속 경쾌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고 탈곡기는 빈 쌀포대에 벼를 채워갔다. 빈 볏짚이 쌓여가고 무수히 작은 조각으로 잘린 짚의 부스러기가 사방으로 날렸다. 나는 주로 빈 짚을 멀리 던지는 일을 했다.


하루 탈곡을 하면 작은 동산처럼 볏짚이 쌓였다. 일하다 틈이 나면 볏짚 언덕 사이를 파고 들어가 한 잠 늘어지게 잤다. 따뜻하고 향긋한 지푸라기 냄새가 온몸을 감싸줬다. 나는 그 냄새를 지금도 좋아한다.


논바닥에 줄지어 흩어져 있는 지푸라기가 어린 시절 기억 속의 그리운 향을 떠오르게 했다. 들판을 걷길 참 잘했다.


목표는 한 가지일 수 있다. 날씬해지기. 그러나 목표를 향해 걸으며 받는 선물은 정말 많다. 길을 걸으며 눈길 머무는 작은 것 하나하나가 나에게 자꾸만 준다. 멈춰 있었다면 받지 못했을 소소한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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