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를 뛰어넘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넘어보지 못한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에 오른다.
지구의 경계를 넘어 우주로 향한다.
깊은 심해를 헤엄치기를 꿈꾼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그들은 자신의 한계가 아닌
인류의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불가능해 보이는 무수한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
부서지도록 노력한다.
그런데 나의 한계는 조금 다르다.
할 수 있었던 것을 할 수 없도록 금지당한 것.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었던 방,
그 방문에 누군가 나 몰래 자물쇠를 채워 잠가 놓은 것처럼,
누렸던 자유를 억압당한 것 같다.
그래, 억압.
한 발 앞 머리 높이의 선반에 있는 컵을 꺼내기 위해 왼손을 뻗었다.
보통 오른손은 뭔가 물건을 쥐고 있거나 다른 일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왼손에게 그 일을 시키는 것이다.
혹은 쥐고 잡고 뻗어서 가져오는 등의 일은 왼손이 하도록
뇌에서 이미 시스템화되어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아프다고 내내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몸과 마음에게)
왼팔이 자연스럽게 선반 위로 올라간다.
쭉 뻗었으나 거의 다 닿았으나
뻑뻑하고 짜르르한 느낌과 함께 굽힌 팔은 다 펴질 줄 모른다.
어깨와 팔꿈치에 통증이 전해진다.
찌릿한 아픔이 나의 한계는 여기까지라고 말해준다.
앞치마를 두르는 자연스러운 행동 또한 그렇다.
살면서 초등 중등 고등학교를 다닐 적 빼고는 열중쉬어를 해본 기억이 없다.
그러니 열중쉬어가 안 되어도 생활에 큰 지장이 없다.
그런데 매일 입었다, 풀었다 하는 앞치마는 다르다.
아침 출근과 동시에 종일 내 몸에 걸쳐진 앞치마는
오른손 왼손에 끈 하나씩을 들고 나비 모양으로 묶어야 완성된다.
끈을 쥐고 허리 뒤춤으로 팔을 보낸 뒤 보이지 않는 숨결로 매듭을 완성한다.
그런데 그것이 딱 열중쉬어의 자세다.
나는 열중쉬어를 매일 하고 있었다.
그 자세를 못 하면 앞치마 하나를 못 매는 신세다.
학교에서 열중쉬어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오십견이라는 증상의 병을 앓고 있는 누군가가
열중쉬어 자세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내 품 안에 쏙 들어오는 복실이,
막내 딸아이와 걸을 때면
내 왼팔을 들어 올려 다정하게 아이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둘이서 걸을 때 복실이는 자주 내 왼편에 서는 것 같다.
늘 왼쪽 팔을 들어 아이의 어깨에 둘렀다가
팔이 불편하면 그제야 깨닫고 오른쪽으로 옮긴다.
손을 들어 뻗기가 안 된다.
열중쉬어 자세, 앞치마 매는 자세가 힘들다.
어깨동무가 안 된다니...
안 아플 때는 전혀 문제 되지 않았던 자세들이다.
나에게 주어졌던 일련의 자연스러운 행위들을 빼앗긴 듯 불쾌하고 억울한 기분이 든다.
한 뼘만 더 뻗으면 손에 닿을 것 같은데
팔이 펴질 것 같은데
통증 때문에 더 움직이기를 멈춘다.
신체적 한계에 다다랐을 때 나는 움직이기를 멈추었다.
한계, 구속, 자유로움의 박탈, 족쇄.
나를 아프게 하며 구속하는 것들로부터 도망치고 싶다.
그러나 나는
팔을 뻗어 선반 위의 그릇을 잡아야 하고
팔을 뒤로 보내 앞치마를 매야 하고
아이의 어깨에 팔을 얹어야 한다.
도망치면 안 되고, 도망칠 수 없고, 도망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겨내고 극복하리라.
아픔을 이겨내는 것에 그치기를 바라지 않는다.
먼 하늘을 날아 우주를 꿈꾸는 이들처럼
나는 나의 한계를 도전 과제로 삼아 그것을 뛰어넘기를 바란다.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더욱 도약하기를 바란다.
한계가 생긴다는 것은
장애물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매물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회피할 수도 있고
뛰어넘을 수도 있다.
한계를 발판으로 삼아 나는 높이 뛰어오를 것이다.
그전에 무수한 고통이 따르겠지만.
“아이고 목이야.”
오늘은 어깨와 목이 연결뇌는 부분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