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밥만 먹고는 살 수 있나

by 눈항아리

사람이 밥만 먹고는 살 수 있나. 고기도 먹고 과일도 먹고 채소도 먹어야지. 안에서만 먹나 나가서도 먹고 배달도 시켜 먹어야지. 맛난 것도 먹고 예쁜 것도 먹고 근사한 것도 먹어야지. 달달한 간식도 때때로 먹어 줘야 하지. 간식이 달달하기만 하겠어? 입이 궁금하고 심심하면 씹는 맛도 필요한 법이야. 목으로 술술 넘어가는 음료는 종류별로 얼마나 많으냐 말이야.


정말 밥만 먹고는 살 수 없지. 사람이 일만 하고 살 수 없는 것도 똑같아. 거친 일상 속에서 아등바등한다고 힘듦에 휩쓸려 가는 건 아니야.


고기는 안 좋아하지만 가끔 육즙 가득한 한우 구이 한 점도 생각나고. 과일은 안 좋아하지만 입에서 상큼하게 터지는 껍질 속 달콤하게 흐르는 과즙도 생각나고. 달달한 건 안 좋아하지만 때로 마카롱 한 입을 베어 물고 싶을 때도 있잖아. 이가 안 좋아도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어 먹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해. 며칠을 이가 아파서 고생하면서도 당장 씹고 싶은 걸 어떡해.



일의 무게만으로도 고단한 날들 속에 책가방 하나를 더 짊어지고 다니지. 가방은 하나 더하기 하나, 늘 두 개야. 내 어깨가 좀 넓어서 그래.


하나 더 짊어진 책가방, 그 속엔 건라면 하나가 들어있어. 세 개 먹고 하나 남았는데 왜 가방에 아직 있는 걸까. 까만색 주방 모자도 구겨진 채 들어가 있어.


작은 네모 9 볼트 건전지가 들어있어. 9 볼트 건전지는 현관문에 필요한 것인데, 현관문은 겨울이 되면 배터리가 금세 닳아 ‘삑삑’ 경고음이 들리곤 하거든. 겨울을 위해 봄부터 지고 다녔지. 대단한 준비 정신이네.


그런데 현관문 배터리는 AA건전지 세 개인가 네 개인가가 들어가는데 왜 내가 9 볼트 건전지를 들고 다니는지 궁금하지? 이건 겪어봐야 아는 일이야. 나도 처음 겪을 땐 당황해서 혼자 어쩔 줄 몰랐지. 배터리가 다한 문을 밖에서 열려면 강력한 전기 충격이 필요한가 봐. 9 볼트 건전지를 정해진 위치에 가져다 대면 AA건전지가 수명을 다해도 문이 열려. 닫힌 문을 열어주는 기적 같은 전기력이지.


추운 겨울날 아이들 넷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우리 마을 마트 문은 8시면 닫거든. 그마저도 5분 넘게 차를 달려 나가야 하지. 그때 문을 열었던 시골의 비싼 편의점의 존재가 얼마나 감사하던지. 그때부터 가방에 비상용 건전지를 넣고 다녔지. 남편은 AA 건전지를 몇 개 사놓으면 된다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언제 또 위기의 상황을 맞을지 모르잖아?


그런데 묵직한 1.5 볼트 건전지 한 쌍은 왜 가지고 다니는 거지? 가방 밑바닥 구석에 있네. 어쩐지 가방이 무겁더라니. 언젠가 사놓고 가방에 보관하고 있었나 봐. 두 개 사고 하나는 보관용이지. 이것도 내가 쓰는 거야. 가끔 저울의 아주 까끔 건전지가 꺼지거든.


진통 소염제 한 갑이 있고 관절통 약도 하나 있네. 우편물도 하나 들었고 언젠가 은행에 다녀온 흔적의 종이들도 잘 수납되어 있어. 꼬깃꼬깃 접힌 채로. 필통 두 개가 그 사이에 섞여 뒤죽박죽이야.



그 모든 엉망진창인 가방을 평정하는 묵직한 존재가 하나 있지. 매일 아침저녁으로 가방의 잡다한 존재들을 꾹꾹 눌러 평정해 주는 그건 벽돌책이야.


요즘은 우주에 관해 읽고 있지. 삶에 치여 살면서, 팔다리가 휘청거리고 눈에 핏대가 서도록 피곤에 절어 있으면서 웬 책이냐고. 웃기지 말라고. 우주는 무슨 나발이냐고. 내 방 하나 건사 못해 절절매면서 무슨 원자고 중성미자고 반물질, 암흑물질이냐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들을 귀에 쑤셔 박아서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좀 전에 읽은 책에서는 초신성이 폭발했지. 다 날아가고 중성자별 하나만 남아 뱅글뱅글 돌고 있지. 등대처럼 자전하며 빛을 낸다지. 그 빛을 펄스라 부른다지. 이름은 왜 또 하나에 하나씩 다 갖다 붙여서는. 잠시의 종이 책을 넘기며 나는 또 멈췄다.


나는 금방 녹말을 가라앉힌 생강물을 분리해 계량을 하고 큰 냄비 두 개를 불에 올리고 있었는데. 생강 냄새를 뒤집어쓰고 흙생강을 까다 왔는데. 초신성 폭발이라니, 중성자별이라니.


현실과 책과의 괴리. 그 머나먼 거리에서 오는 간극을 나는 어떻게 메워야 할까. 일을 몰아서 할 땐 머리를 쥐어짜는 책 말고 머리를 식히는 책으로 골라야 했는지도. 괜한 욕심을 부리며 붙잡고 있는지도. 그래도 놓기는 싫고 한 문장이라도 읽고 싶어서 책 장 살랑거리며 붙잡고 이 고민을 하는 것이지.

하루의 절반을 꽉 채우고도 모자란 시간. 일이 박스째로 쌓여 있지만 가방에 벽돌 책 하나를 챙겼지. 무선 자판도 하나 구겨 넣었지. 지퍼가 안 닫혀 낑낑거리는 걸 보고 남편이 혀를 차더군. 지퍼는 오른손이 당기는데 가방을 잡고 있는 왼손이 아파서 한참을 실랑이하는 걸 보고 그냥 쌩 가버리는 거야. 하긴 그 책 한쪽을 읽겠다고 들고 다니는 내가 이상한 사람인지도.


일만 하고 살 수 없어서 잡동사니 가득한 터질 것 같은 가방 속에 책을 넣어 가지고 나왔어. 나의 일터에.


사실 벽돌책은 밖에 가지고 다니기 힘든데 굳이 가지고 나오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여기 있어. 나 같은 사람. 읽다가 손에서 놓기 싫어서 그런 거니까 그런 사람을 보더라도 이해해 주기를 바라.


밥만 먹고살 수 없어서 오늘도 글 한 줄을 읽어. 밥에 국을 말아 후루룩 욱여넣는 날도 있지만, 산해진미를 미세한 혀의 감각으로 맛보는 날도 있는 거지. 맵고 짠 게 당기는 날도 있는 거야. 오늘은 초신성이 폭발했다는 내용이었지. 나와 전혀 상관없으나, 본질적으로 나와 닿아있는 내용이라고 우기면서 그저 맛보는 거야. 그래 글을 읽으며 나는 오늘을 맛보고 있어. 매일 다른 맛. 인생의 맛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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