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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꾸러기 일상을 깨뜨리다

by 눈항아리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책을 읽고 있고 일상을 깨뜨려 볼까 했다.


아이들 누룽지 탕을 끓여 주면서 나는 딱딱한 누룽지를 오독오독 씹었다. 동그라미 한 판을 다 먹었다. 다 먹고 배가 엄청 불렀다.


아침마다 백허그를 해주는 남편 대신 내가 먼저 남편을 안아줬다. 그르렁거리는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안아주니 재밌었다.


아이들 넷을 깨우며 발가락을 간질이고 겨드랑이를 살살 간지럽혔다. 머리카락으로 귀와 콧구멍을 간지럽히고 팔뚝을 간지럽혔다. 모두 웃으며 잠에서 깼다. 아침의 시작이 좋았다.


평범한 출근은 싫다. 출근과 동시에 남편에게 데이트를 청했다. 종일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우리는 서로 데이트 청하는 일이 거의 없다. 커피숍을 오래 했다. 어디 나가 단 둘이 커피를 마시는 건 생각도 안 해 봤다. 스무 살의 어느 날에는 바다 앞 커피 거리를 거닐며 자판기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이제는 그런 낭만이란 없다. 굳이 복잡한 바다까지 가야 하나? 그래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가자는 남편의 말에 자리에 앉았다. 앉으니 남편은 일어서기 싫었나 보다.


어디 가려고?


데이트에 목적이 없다. 누구든 생각해 뒀던 곳이 있어 냉큼 꺼내면 좋으련만 나도 남편도 딱히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없다. 참 닮은 우린 데이트 장소도, 밥 먹는 장소도 한 번에 고르는 법이 없다. 고르고 돌고 생각하다 보면 데이트는 그저 밥 한 끼 먹는 시간이 되기 일쑤다.


아침 장사 준비로 바쁜 시간에 남편까지 끌고 나갈 생각을 했으면 꼭 가고 싶은 곳을 대거나, 가야만 하는 곳이 있거나, 적어도 정해둔 곳이 있었어야지. 장소와 목적을 묻는 간단한 물음에 머뭇거리자 남편은 단박에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여기는 듯했다. 이 여자가 아침부터 변덕을 부리는구나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낌새를 보이자마자 나는 어제 남편이 가기를 원했던 마트 세일의 현장으로 가자며 목적지를 말했다.


마트에 3980원짜리 치킨 사러 가자!


망했다. 치킨 사러 마트 가는 게 무슨 데이트냔 말이다. 남편은 인자한 얼굴로,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로스팅하고 있을게. 치킨 사러 다녀와.


졸지에 치킨을 사고 가게에 필요한 과일까지 사 오게 생겼다. 나의 목적은 꼭 데이트는 아니었지만 남편과 나가고 싶은 건 맞았고, 꼭 멋진 곳이 아니라 마트도 괜찮은데 역시나 뜬금없이 바쁜 아침에 남편에게 나가자고 하는 건 아니었나 보다.


그런데 나의 목적은 정말 꼭 데이트였을까? 일상을 좀 바꾸자는 의도였고 평소와 다르면 될 뿐일 지도 몰랐다. 억지를 부리며 그 상황에 남편을 끌고 마트에 간다면 서로 얼굴을 붉히며 바쁨을 뿜어내며 발을 빠르게 굴렸을 지도. 가게는 열어야 하는 게 맞고 데이트는 어그러졌지만 일상을 깨뜨리는데 누구랑 꼭 함께할 필요는 없다. 데이트 실패.


나는 다른 목적과 방법을 찾아 기웃거린다. 홀로 데이트, 가볍게 이름을 바꿨다. 이름만 바꾸었을 뿐인데 홀가분해졌다. 혼자 가니 책 한 권을 챙겨 들었다. 엊그제 선물 받은 새 잠바로 바꿔 입고 차에 올랐다. 마트까지는 차로 5분이 채 안 걸린다. 신호등 세 개만 지나면 되는 거리, 나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깝다. 떠나다,라는 이름이 무색하다. 그러나 구멍 뻥뻥 뚫린 고무신발 사이로 찬 바람이 숭숭 들어온다. 바람이 제대로다. 멀리 가지 않아도 일상을 잠시 떠난다는 건 신발에 뚫린 구멍에 바람이 들어오듯 가슴에 시원한 바람을 넣어줄 수 있다.


일상을 깨뜨린다는 건 조금 삐그덕 거려도 가슴에 시원한 바람 한 줄기를 넣어주는 것인지도.


마트에 가서 줄을 섰다. 치킨을 사려는 줄인 줄 알았는데 마트 문 여는 시간이면 으레 줄을 서서 들어가는가 보았다. 오픈런하는 느낌으로 서둘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 식품 매장으로 내려가 바로 치킨 코너로 갔다. 치킨을 사려고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고 보니 3980원 치킨은 11시에 나온다고 했다. 11시에는 우리 가게도 문을 열어야 하는데 기다릴 수 없었다. 치킨 대신 닭꼬치를 카트에 넣고, 큐브 닭가슴살을 카트에 넣었다. 그것으로 성에 안 차 영계 네 마리를 담았다. 3980원의 스무 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마트에 바치고 가게로 돌아왔다. 일상을 깨뜨리면 돈이 든다. 평상시 들어가지 않던 돈이 든다. 어차피 먹을 것이지만 큰 마트에 가면 더더더 많이 사게 된다.


바람은 찔끔 쐬고 돈은 많이 쓰고 왔다. 애초에 갈 곳을 마트로 정한 게 잘못이다. 데이트 장소를 정할 때 마트는 피하자. 홀로 데이트로 변경했을 때라도 장소를 바꿀 걸 그랬다.


혼자, 둘이, 모두 함께 가고 싶은 곳을 한두 군데 정도는 정해두어야 할까. 머릿속에 저장. 차차 찾아보기로 하자.


두 손 가득 장바구니를 들고 늦게 출근한 나는 평소보다 바빴다. 깨뜨린 일상의 틈새를 메우기 위해 평소보다 더 열심히 뛰어야 했다. 늦은 오픈 준비로 분 단위 시계를 맞춰놓고 주방과 홀을 마구 뛰어다녔다. 내 할 일을 남편이 해 주는 것이 아니라서 그렇다. 남편의 일과 내 일이 확연히 구분이 되어서 그렇다. 우리는 1인 다역으로 뛰는 막강 파워 부부 자영업자라서 그렇다.


몰랐다. 깨뜨리고 나면 뒤처리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처리는 내 몫이라는 것을. 책에선 다양한 예들을 나열해주지는 않았다. 나의 상황과 같은 일이 있을 수는 없겠지. 완벽하지 않은 도끼질이었다. 바쁜 일상 속 틈새를 찾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일 매 순간 시도한다면 조금씩 조금씩 일상 속에 숨어있는 나의 진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책을 한쪽을 읽고 나에게로 건너가는 다리를 건설하기 위해 나는 일상을 깨뜨리는 작업을 했다. 정신없었고 색달랐고 재미있었다.


깨뜨림.


어느 날은 일상에 휘둘리고, 어느 날은 일상에 부딪치고, 어느 날은 일상을 두드리고, 어느 날은 일상에 박치기를 한다. 그리고 어느 날은 일상을 부수고 뒤엎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일상을 깨뜨렸다. 깨진 틈새로 다리를 놨는지 나를 봤는지 아닌지 아직 모른다. 하루아침에 만들면 그게 다리겠는가. 천천히 조금씩 튼튼하게 건설하기로 하자. 책은 두루뭉술하다. 이렇게 매일 깨뜨리면 확실하게 나를 발견할 수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일상을 깨뜨리는 건 재미나다는 거다. 일상에 어제와 다른 재미를 더하고, 평소와 다른 즐거움을 더하는 것,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무료함을 덜어낸다. 그건 정말 획기적인 거 아닌가?



재미나게 즐겁게 기발하게 일상을 깨뜨려 보자. 평소와 다른 나를 상상하면 쿡쿡 웃음이 난다. 어떤 장난을 칠 것인지 기대된다. 왜 내가 장난꾸러기 말썽꾸러기가 된 것 같은 생각이 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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