잣 까먹기처럼

<일상, 깨뜨리다>

by 눈항아리


아버지의 과수원에는 온갖 나무가 다 있었다. 사과나무, 배 나무, 복숭아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 앵두나무, 호두나무... 그중 가장 키가 컸던 잣나무. 잣나무에 열매가 달리면 아버지가 나무에 올라갔다. 나무 타는 아버지라니 그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원숭이처럼 나무를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간 아버지는 파인애플과 솔방울을 절반씩 닮은 잣 솔방울을 땅으로 떨구었다.


말갛고 하얀색의 고소함이 입안에 사르르 퍼지는 잣. 미색의 부드러운 잣 맛을 아는 나는 호두보다 작고 호두 껍질보다 단단한 잣 껍질을 보고 의지를 불태웠다. 손톱만 한 잣을 까먹겠다고 마음을 다지다니 우스운 일이지만, 까먹는 잣 맛을 본다면 누구나 그런 의지를 불태울지도 모른다. 그건 크나큰 노력 뒤에 오는 애간장 타는 듯한 감질맛이다. 갈망 뒤에 맛볼 수 있는 성취감이다. 그러나 그 껍질이 너무 작고 단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깐 잣을 사 먹을 수도 있다. 아니 누군가 잣 솔방울을 본다면 모르고 지나칠 가능성도 있다. 시장에 파는 잣과는 차원이 다른 자연의 모습 때문에 그렇다.


한 알 의 잣을 까먹기 위해 어린 나는 망치를 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도구를 찾았다.


망치 하나를 들고 꽝 내리치면 잣이 짓이겨졌다. 그래도 별다른 도구가 없었던 나는 가끔 잣 열매보다 훨씬 큰 망치를 들고 잣 껍질을 내리쳤다. 그중 살살 쳐서 살아남은 속 열매는 먹고, 세게 쳐서 찌그러진 것은 못 먹었다. 잣을 까먹던 어느 날 잣 크기와 비슷한 펜치를 찾아왔다. 손의 악력으로 살살 누르며 조절을 할 수 있게 되자 잣이 짓이겨지는 일이 줄어들었다. 펜치로 잣을 누르면 껍질에 균열이 생긴다. 그 갈라진 틈을 비집고 손가락 끝에 힘을 줘 껍질을 벌린 다음 잣 알맹이를 꺼낸다. 열매 하나를 먹겠다고 들이는 노력은 정말 가상했다. 찔끔찔끔 한 알씩 입 속에서 퍼지는 즐거운 맛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던 어린 날의 잣 까기.



일상을 깨뜨리는 일은 망치로 꽝 내려치는 것이 아닌, 잣 껍질을 까는 것처럼 펜치로 살짝 균열을 내고 그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내 일상이 짓이겨지고 부서지면 안 되니까. 나의 일상이 나의 손에서, 나의 능력 범주 안에서 복구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깨뜨리는 거다.


왜 그것을 깨고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잣 열매의 고소한 맛을 맛보고 싶으니까. 단단한 껍질 속에 싸여 보이지 않는 내 진면목을 보고 싶으니까. 깨뜨리지 않으면 깨지지 않는 단단하게 굳어진 일상이니까. 그렇게 반복되는 건 지루하니까. 그저 그런 일상이 아니었으면 하니까. 더 재미나고 즐겁기를 바라니까. 그 속으로 고소함이 퍼지기를 바라니까. 깨뜨림은 바꿀 테니까.



오늘의 깨뜨림.


피곤으로 샤워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길 차 안에서, 아이들은 건조한 피부에 톡톡 파우더를 덧칠해 주듯 쌈박질을 한다. 소리가 커지고 차가 흔들흔들하고 머리가 윙윙댄다. 조수석에 앉은 복이가 귀찮은 목소리로 동생들 교통정리를 한다. 들을 리 만무, 그래도 잠시 효과가 있다.


경포 사거리 신호등을 지나는데 그새 심심해진 달복이가 휘파람 연습을 한다. 화장실에 들어가서도 노래 연습을 하더니 음악에 꽂힌 걸까. 날카로운 파열음이 귀를 찌른다. 선명하고 맑은 휘파람이라면 고운 새의 소라가 났을지도 모른가. 그러나 정제되지 않은 긁는 듯한 쇳소리가 난다. 저 입을 막고 싶다. 귀와 연결된 안구가 갑자기 찌르르 고통을 호소하는 것 같다. 눈과 귀는 연결되어 있는 것이 맞을까. 아 심장이야. 심장이랑 연결되어 있나? 머리는? 두통이! 휘파람을 멈추고 싶다. 확 소리를 지를까 했다. 밤에 휘파람 불면 뱀이 나온다는데 왜 한밤중에 무섭게 휘파람을 불고 난리람.


잠시, 나의 일상을 깨뜨림, 그걸 실행해 보자 마음먹었다. 어떻게? 이건 순발력의 문제인데.


나도 휘파람을 불었다. 내 휘파람 소리는 높낮이가 없다. 소리는 선명하지만 같은 음의 소리를 길이만 다르게 내는 수준이다. 그래도 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니 노래 하나는 마쳐야 했다. 나의 휘파람 노래가 흥얼흥얼 흥을 냈다. 옆자리에 앉아 가는 복이는 또 심드렁한 목소리로 싫은 소리를 해댔다. 내 노래에 흥겨워 그 소리가 뭔 소리인지 안 들렸다. 내가 휘파람을 불기 시작하자 달복이가 바로 흥미를 잃은 듯 말했다.


에이 이거 잘 안 되네.


효과 만점이었다. 시끄러워, 조용히 해, 같은 부정의 말 말고도 휘파람을 멈추는 방법은 많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긍정을 해줄 수도, 부정을 할 수도, 옹호해 줄 수도, 그저 싫은 티를 팍팍 낼 수도 있다. 그러나 거짓을 말할 수는 없다. 그럼 휘파람을 따라 부는 것처럼 평소 내가 안 하던 의외의 행동을 해 보는 건 어떨까. 그건 긍정이면서도 달복이의 휘파람을 멈추었다.


피곤에 절은 퇴근길 차 안에서 휘파람 부는 아이를 대하며 나는 선택할 수 있다. 소리를 지르며 아이에게 휘파람을 멈추라고 말하는 대신 다른 여러 가지 선택.




그러나 때로 너무 힘들 때 그런 선택의 순간조차 지나쳐 버리고 만다. 달복이에게는 휘파람에 휘파람으로 대응했지만, 복실이에게는 확 소리를 질러 버렸다. 순간 어두워진 아이의 여드름 얼굴이 바닥을 쳐다봤다. 실수했구나,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점심을 먹으며 복실이는 짜장면이 맛이 없다고 여러 번 말했다.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바쁜 와중에 밥을 시켜줘도 불만이다. 그만 먹으라고 아이에게 냅다 소리를 질렀다. 평소에 짜장면 한 그릇을 다 먹고 밥까지 말아먹는 복실이인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챙겨주고 보아줄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때론 잘 안 될 때도 있다. 특히 많은 의무가 한꺼번에 겹쳐 올 때, 밥과 일과 아이의 바람과 부모의 바람이 한꺼번에 충돌할 때 그런 것 같다. 그럴 땐 어떡하지. 그때도 나는 여러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게 분명하다. 아이에게 소리를 지른 것, 그리고 나의 바쁨을 토로하며 아이가 투정 부리기를 그만 두기를, 빨리 식탁이 정리되기를 바란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풀 죽어 있는 모습이 계속 뇌리에 남는 걸 보면 나의 선택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다음에는 아이를 우선순위에 두고 선택해 보자. 평소 일에 더 힘을 쏟았다면 때로 아이에게 시간과 정성을 쏟으며 할애하는 것이 깨뜨림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일상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참 애쓴다.


깨뜨림은 일상의 밸런스를 맞추려는 나의 무한한 몸부림일 지도 모르겠다. 잣을 까먹기 위해 망치와 펜치를 들고 고군분투하던 어린 시절의 나처럼.


시시콜콜한 시골의 생활에도 고소함은 필요한 법이다. 일상 속에서 나는 그런 고소함을 맛보고 있나? 깨야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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