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중 가장 바쁜 가을. 삼백 킬로그램 박스를 해체해 가을청을 담았다. 홀가분하다. 한 캔 맥주로 축배를 들었다.
바쁘던 일이 뭉텅이로 사라지자 빈 시간이 생겼다. 빽빽하게 채우던 일정이 사라져서 그런 걸까, 심심하고, 무료하고, 지루하다. 재미있는 걸 찾아 헤맸다. 나의 이런 욕구가 힘듦을 내 삶 속으로 끌어들이는 건 아닐까.
여유로움은 다른 일정과 생각으로 채워지게 마련이다. 거세게 몰아치던 바람은 잦아들고 찬 바람일 망정 살랑바람 부는 나른한 오후 꾸물거리는 진흙탕을 헤치고 나온 자질구레한 소음들이 머릿속을 웅웅 울린다.
정신없이 바빠 생각할 틈조차 없다 찾아온 여유. 곧이어 작은 소란스러움들이 한꺼번에 몰아친다. 두통, 손 저림, 오십견, 불면, 피곤, 잡다한 살림의 무게, 그리고 가지 많은 나무의 흔들거림. 그중 가장 큰 부산함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심심함이다. 어디에서부터 안정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지 막막하다.
큰 목표는 삶을 지탱한다. 큰 고난은 잡다하고 사소한 무수한 걱정거리를 훅 날려버렸었는 지도 몰랐다. 날려버린 것이 아니고 잠시 가린 것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큰 이슈로 작은 사건을 덮는 그런 드라마 속 이야기처럼. 내 일상을 채우고 있던 소요는 늘 빼곡히 쌓여있다. 가득 채워져 있다. 잊고 있느냐, 가려지느냐, 드러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거대한 일상에서 소란스러운 일상 속으로 진입하는 중이다. 늘 하던 일인데도 적응하기 쉽지 않아 갈피를 못 잡아 허둥대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삶은 잔잔하다 들썩거리며 반복적으로 요동치는 심장박동 같다. 철썩거리며 들락거리는 파도 같다. 큰 파도, 작은 파도, 작은 파도, 작은 파도, 큰 파도가 쉬지 않고 몰아친다. 강약중간약 박자를 맞춰 계속 울려 퍼지는 음악과 같다.
변화가 물밀듯 밀려오는 해변에 서 있다. 멍 하니 수평선을 바라보고 하늘을 바라보고 넘실거리는 파도를 감상한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갈매기 한 마리에게 시선을 빼앗긴다. 그렇게 몽롱한 상태로 며칠을 흘려보냈다.
조바심이 난다. 책을 죽죽 읽지 못해서, 글자를 쏟아내지 못해서, 머리가 팽글팽글 돌아가지 않아서, 마구 달리고 걷고 쏘다닐 에너지가 넘치지 않아서.
멀찍이 서서 나를 바라보니 참 애잔하다. 잠시 쉬지 못하고 아득바득 서핑 보드를 부여잡고 파도를 타려는 나. 잔잔한 파도 위에서 커다란 파도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나. 그런 나에게 쉼을 허하노라. 낮잠을 허하노라. 퍼질러 있기를 허하노라. 멈추기를 허하노라.
지금은 잠시 쉴 시간이다. 높은 산, 작은 언덕을 꾸준히 오르내리려면 간간이 숨 고르기 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긴 음악을 연주하려면 쉼표에서 쉬어야 한다.
올 가을에는 그저 불평, 불만, 짜증을 토로하지 않았다. 세심하게 관찰하듯 내 일상을 차분히 들여다보았다. 격정적인 감정의 일렁임을 잔잔한 물결로 흘려보내는 이상한 현상을 마주했다. 이건 글의 힘일까.
이 와중에도 태양은 떠오르고 지구는 돌고 있다. 아이들은 말썽을 피우고 열이 오르내린다. 기말 시험 준비로 바쁘고 학원을 오간다. 픽업은 계속되고 겨울은 오고 있다. 눈 예보에 기겁을 하고 오십견이라 눈삽을 안 들어도 되어 환호하기도 한다.
삶은 흘러가고 나도 함께 흘러간다. 이렇게 잠시 호흡을 고르다 보면,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삶의 템포를 조절할 줄 알게 되는 걸까. 차분히 나를 들여다보는 내가 낯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