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파제가 있는 바다 산책

by 눈항아리

바람만 안 불면 덜 추울 텐데. 바다 산책길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여행객의 말이다. 옷깃을 여미며 한껏 웅크린 어깨는 바람의 위용을 말해준다. 온몸 가득 한기를 품고서도, 갓난쟁이를 품에 싸안으면서도, 벌건 얼굴이 안쓰러운데도, 아이 엄마는 모래 위를 어기적거리며 걸으면서 환한 미소를 품고 있다.


모래를 밟아볼까 고민하던 나의 손은 딸아이가 잡고 간다. 신발에 모래가 들어가면 좀 귀찮은데. 남편이 사뿐사뿐 걸으라고 말하며 아들의 손을 잡고 앞서간다. 사부작거리며 푹푹 꺼지는 모래를 밟아 간다. 모래밭을 지나 방파제로 향한다.


방파제 위를 걷는다. 백 년은 굳건히 견딜 것 같은 콘크리트의 단단함이 발아래에서 느껴진다. 어릴 적엔 방파제에 올라가기만 해도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는데. 나보다 나이를 많이 먹은 작은 부두는 곰보 자국 같은 파임이 여럿이다. 콘크리트도 세월의 흐름을 피해 갈 수 없나 보다.


파도를 조심하라는 경고 문구가 여럿 보인다. 그래도 파도는 가까이서 보고 싶다. 해안에 서면 신발을 벗고 맨발을 하고 바닷물에 뛰어들어가고 싶은 심리 같은. 방파제 양쪽으로 갈라진 하얀 파도는 거센 거품 물살을 헤치며 지나간다.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이 파도인지 나인지. 방파제 끝까지 다가가 테트라포트의 네 발 사이로 바닷물이 내려다보일 때까지 걸었다.



수평선 가장 가까운 곳에 다다라 바다의 저편에서 너울처럼 밀려오는 파도를 마주한다. 파도는 울렁대며 다가와 부딪힐 곳을 찾는다. 돌덩이 같은 구조물에 몸을 때리고 하얗게 부서진다. 물보라가 일어난다. 수평선 위로 하얀 물방울을 튀기며 올라가고서도 방파제 끝 콘크리트 길 위에 오르려고 안간힘을 쓴다. 욕심이 많은 파도다. 어디든 못 갈 곳이 없는 물방울인데도 기를 쓰고 내달린다.


발아래 내팽개쳐지는 물줄기를 피해 딸아이와 나는 한 발, 두 발 뒤로 물러났다. 춥고 시원하고 후련하고 막막하다. 아련함과 아쉬움. 바다 위를 달리는 바람에게 마음을 실어 보낸다. 답이 없는 청록의 파도를 뒤로 하고 돌아선다.


단단한 콘크리트 방파제에서 내려와 푹 꺼지는 모래밭에 발을 얹었다. 왜 안도감이 드는 걸까. 발아래에서 흩어지는 모래알, 무너지는 땅을 밟으면서 마음이 놓인다.



해안을 따라 쭉 늘어선 잘 정비된 산책로를 걷는다. 넘쳐흘러 도로를 침범하던 파도,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던 모래. 해안에는 모래를 퍼부었고,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도로에는 산책로 방벽을 만들었다. 그래봤자 파도를 막을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장은 파도가 밀려와 덮치지는 않으니. 모래 위를 어기적거리며 걷지 않아도 되고 자동차를 피해 일렬로 걷지 않아도 된다. 넷이서 손을 잡고 걷기는 힘들어도 둘둘이 손을 잡고 걷기에 충분히 넓다.


군데군데 놓인 의자, 바다와 하늘과 수평선을 바라보는 기다란 의자. 나도 그 의자에 앉고 싶지만 그저 걸으며 의자에 앉은 존재들의 자취를 눈으로 좇았다.


바다를 보고 앉은 기다란 의자 한쪽에는 누군가 잊은 빨간 장갑 한 짝이 쓸쓸하다. 그 마음을 아는지 바람에 훠이 불어 멀리 가지 못하고 다른 한 짝 빨간 장갑은 의자 아래 한 발 앞에 떨어져 있다. 멀리 가지 않아서 다행이다. 다행은 무슨.


수평선을 보고 앉은 긴 의자에는 카멜색 목도리가 남겨졌다. 카멜색은 사자, 낙타, 골드레트리버의 털 빛을 닮은 따뜻해 보이는 색깔이다. 바닷가 모래 위 의자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바다와 하늘을 보고 앉은 기다란 의자에는 두 명이 앉아있다. 귀마개를 했다. 귀를 막는 헤드폰이다. 바닷소리도, 바람 소리 안 들린다. 바다와 하늘이 보이는 기다란 의자에 앉아 굳이 목을 한껏 수그리고 핸드폰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반복되는 동영상을 본다. 귀여운 어린이들이다. 우리 집 큰 놈들도 어디든 앉혀 놓으면 저러고 있을 텐데. 바다까지 온 것이 어딘가. 바닷바람을 맞고 있지 않은가. 시린 볼을 바닷바람에게 내어주지 않았던가. 어디 눈으로만 보는 것이었던가. 바다는 온몸으로 맞이하는 것이니까. 그 바다가 싫다고 안 따라온 아들 녀석들도 있는데.


바다 산책을 하고 돌아왔다. 남편은 아들 손을 잡고, 나는 딸아이 손을 잡고 걸었다. 큰 아이 둘은 내 아버지의 집 안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방구석에 드러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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