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명태>를 쓰고 있다
나의 작은 집에서 나의 작은 공간 안에서 나 하나 힘든 것만 보이는 작고 작은 사람, 그게 바로 나다. 지금도 역시나 나의 가정 속에서 나의 작은 사회생활 범위 내에서, 내 작은 인간관계 속에서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좌절하고 우울하고 땅을 치고 나만 억울한 양 울고불고하는 사람, 그게 바로 나다.
그 시절 우리 동네는 명태 일로 특화된 동네였고 우리 부모와 비슷한 또래의 많은 부모가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웠다. 속속들이 남의 집 사정을 다들 알 수는 없을 테지만, 다 커서 들은 바로는 명태일 하는 집에선 집안일처럼 아이들 손을 다들 빌려 썼다는 걸 알았다. 유독 나만 아프고 억울했던 건 아니다. 크기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시절, 우리 동네에서는 다들 비슷하게 살았다.
뭉뚱그린 나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집을 넘어 골목을 누비며 보이지 않는 남의 집 대문 너머를 바라보려고 애썼다. 그건 시간이 흘러 알 수 있었던 것이지만 과거로 돌아가 명희의 시선으로 억울함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친구들도 명태 일을 조금씩은 도왔고 나이가 들어서 명태 일을 생업으로 삼은 또래도 있다. 시절을 탓하든 동네를 탓하든 부모를 탓하든 나는 누구든 탓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남의 집 높은 대문 너머를 볼 수 없었던 어린 나이, 다른 집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없었던 나이, 동네 친구의 엄마가 명태를 하는 건 알지만 아버지 직업은 뭔지 알 수 없었던 나이. 정말 명태 일만 하는 집도 있었고, 노동 일을 하는 아버지도 있었고, 운전을 하는 아버지도 있었고, 농사를 짓는 아버지도 있었다. 모두들 벌어먹고 사느라 애쓰고 발악했다. 누구 하나 빈둥거리는 사람이 있었던가. 지나다니는 동네 개가 가장 편한 삶을 사는 게 아니었을까.
할머니가 살아계실 적엔 정말 우리 집 아궁이에 나무를 때고 살았다. 학교에 입학하기도 전 내가 유아기였던 시절, 장면만 기억나는 정말 어린 기억이다. 집은 몇 번의 집수리를 했고 그때마다 온 집안의 물건들이 며칠 동안 마당에 나와 있었다. 나무를 때다 연탄보일러로 바뀌었고 후에 기름보일러로 바뀌었다. 부엌은 차차 입식으로 바뀌었고 욕실이 생겼고 화장실도 수세식 양변기가 들어온 지 오래다.
<명태>4편 ‘창난은 추리고’는 가장 아픈 추억에 속한다. 매일 반복되는 추위와의 싸움, 시린 손, 팔 놀림, 지루한 노동의 시간을 마음속으로 갈무리하는 데 며칠을 보냈다. 그런데 한 단어로, 또는 하나의 문장으로 글 속에서 처리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어쩌면 이 또한 회피이거나 미화일 수도 있다는 걸 안다. ) 대청마루 같은 마루를 데우던 연탄난로, 저녁밥 먹기 전에 창난을 사러 오던 장사치 등은 노동의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말해준다.
솔직히 지루한 노동의 시간, 고통, 아픔 같은 건 생각도 안 난다. 잊었다. 너무 오랜 일이기도 하고, 일이 끝나고 알탕을 보글보글 끓여 먹은 일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 지루한 시간들을 싹 지우고 살아서 그래서 나는 잘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란 건 신의 축복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아픔보다 기쁨을 기억하는 나, 긍정 회로가 잘 작동하는 나, 그래서 여태 건강하게 버티고 살아가는 거다. 나의 뇌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국민학생이었던 명희는 새벽부터 오후가 될 때까지 겨울의 마루에서 일했다. 추위에 노출된 상태로 종일 창난을 추리는 일은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힌 일이지만 마루의 기억이 새록새록 올라오며 아픔을 상쇄할 수 있었다. 비록 내 뇌의 긍정 회로가 그 사이에 작동을 해서 아픔을 덜어주려고 하는 노력의 일환일지는 모르겠으나. 그러나 마루라는 공간은 나에게 쉼터이자 놀이터이자 학습공간이고 운동공간이었다. 마루에서 일만 한 건 아니었다. 나의 마루에는 많은 시간과 추억이 새겨져 있다는 걸 알았다.
소가 되새김질을 해서 소화를 시키듯 나는 과거를 되새기며 아픔을 소화시키고 있다.
후기를 쓰는 이유는 <명태>가 소설이라는 허황된 글로 남거나 혹은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명태>는 명희, 나의 어린 시절에게 바치는 애도의 선물이다. 아픈 어린 시절을 충분히 슬퍼하고 탈탈 털어 보내고 싶은 진심을 담아 글을 쓴다.
미련 한 자락이라도 남지 않도록 그래서 맨땅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진흙창같이 생각되었던 과거를 떨쳐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오늘은 그런 생각이지만 글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잘 모르겠다.
‘창난은 추리고’는 정말 아픈 글이 될 줄 알았지만 ‘마루’라는 공간에서의 또 다른 추억이 흥을 돋울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