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건 걸다

by 눈항아리

제 몸 하나는 거뜬히 씻는 아이들. 그것만으로도 장한데 아이들이 크면서 이제는 집안일에서도 제 몫을 당당히 해내고 있다. 각자의 이부자리는 스스로 정리하고, 각자의 옷을 스스로 정리하고, 제 먹은 밥그릇은 개수대에 가져다 두고, 자신이 읽은 책은 책꽂이에 정리한다.



그렇다고 모든 공간에서 정리정돈이 되는 건 아니다. 내가 보기에 아이들 방은 늘 뒤죽박죽이고 아이들 책상은 늘 엉망이지만,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규칙이 있다고 한다. 다만 거실과 같은 공동의 공간에서는 정해진 규칙에 따라주고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그건 하루 만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아직 완벽한 것도 아니다. 오랫동안 꾸준한 잔소리의 결과물이다. 지금도 여전히 내가 잠깐 한눈을 팔면 슬그머니 안 하고 싶은 게 아이들의 심리다. 아이들만 그러할까 나부터 그렇다.



집이 어질러지는 건 누군가 한 명의 사소한 귀찮음에서 시작된다. 한 명이 두 명 되고 둘이 셋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니 나의 입은 쉴 수 없다. 안 되면 될 때까지 입으로 지시하고 반복학습을 시키는 것이다.


“치워, 움직여, 가져다 놔.”


그러나 무식하게 말만 늘어놓아서 될 일이 아니다. 알아듣게끔 쏙쏙 뇌리에 박히도록 영리하고 지혜롭게 효율적으로 전달해야 한다.



또 중요한 것, 누구 하나 빼놓고 말하면 안 된다. 아이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닌, 넷이므로. 넷을 불러 모두에게 말해야 한다.



그런데 나도 평범한 인간인지라 자주 그것을 잊곤 한다. 열심히 똑 부러지게 말했지만 듣는 아이가 한 명이라거나, 두 명이거나, 셋이거나 하면 남은 한 명은 계속 어지르고 다니는 것이다. 못 들었는데 어쩔 것인가.



수건 걸기는 꼭 강조해서 여러 번 주기적으로 방송했다. 내 목소리는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커서 누구 하나 못 들었을 리가 없다.


“얘들아, 수건 쓰고 건조대에 걸어놔. 젖은 거 빨래 바구니에 넣으면 안 된다.”


6인 가족의 빨래 양에 3분의 1을 거뜬히 차지하는 수건. 가족 구성원이 아침과 저녁 씻을 때 한 장씩만 사용해도 하루에 12개의 수건 빨래가 나온다. 딸아이와 나는 2개를 쓰니까 하루 14개. 아들들에게 수건을 두 개 쓴다고 하니 ‘왜?’냐고 묻는다. 머리가 길어서라고 말했지만 딸아이도 나도 머리를 단발로, 커트로 자른 지 오래인데 아직도 여전히 수건은 두 개를 사용한다. 여하튼 수건은 14개. 하루 수건 빨래를 쉬면 대략 28개의 수건이 모인다



수건은 젖은 상태로 나온다. 그러니 웬만하면 매일 빨아야 한다. 수건을 쓰기 위해서라도. 수건장은 수건이 잠시 하루나 이틀 머무르는 곳에 불과하다. 수건장은 묵은 옷이 들어가는 서랍장이나 장롱과는 차원이 다르게 빠른 순환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우리 집 아이들은 나의 꾸준하고 오랜 교육으로, 아니 잔소리로, 젖은 수건은 마땅히 세탁실 베란다에 비치된 안 빤 세탁물 전용 건조대에 넌다. 그 건조대는 보통의 집에선 빨래를 말리를 공간이 분명하지만 우리 집은 안 빤 젖은 수건을 위한 공간으로 특별히 비워둔다. 그러나 수건 건조대가 비는 날은 거의 없고 수건을 빨았을 때 잠시 잠깐 ‘비움’ 상태가 될 뿐이다.



건조대에 걸린 수건은 사용한 상태지만 새 수건처럼 쫙쫙 펴서 걸쳐놓은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누군가 늘 한, 두 명이 문제다.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문에서 가장 가까운 건조대 위에 늘 항상 매번 그냥 대충 수건을 걸쳐 놓는다. 목에 수건을 두르고 다니는 것과 같이 대충 척 올려 놓고 간다. 모양은 상관 안 하고 휙 던져 놓고 가기도 한다.



‘걸다’의 의미란 포괄적이라서 정확하고 세세한 규정이 없다면 그저 걸어 놓는 것만으로 의미를 충족할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의 습성을 하나하나 모두 파악하고 있는 나는 누가 그러는지 다 알고 있다. 그 상태에서 누구 하나 콕 집어 얘기하면 분명 엄마는 또 자기에게만 잔소리를 한다며 입이 댓 발 나올 것을 안다.



그리하여 아이 넷을 모두 불러 모았다. 대답만 하고 움직이지 않는 아이들을 올 때까지 불렀다. 베란다 세탁실 앞에 멀대같이 큰 녀석들이 섰다.


"너희들이 똑바로 펼쳐서 안 걸면 엄마가 팔도 아픈데 다 펴서 다시 걸어야 해. 엄마가 다시 널기를 바라는 사람은 앞으로 그냥 갖다 척척 걸쳐 놔.”


나는 문제의 그 수건을 다시 걸며 딱 그 말만 했다. 행동과 언행으로 보여주는 지행합일의 잔소리 현장.



말이 끝나고 큰 아이들은 방으로 돌아가고 셋째와 넷째는 억울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꼬마들이 나의 밀착 가르침 덕분으로 매일 열심히 수건을 잘 펴서 걸었던걸 나도 안다.



엄마도 알아 너희들이 잘하는 거. 그런데 수건을 대충 걸어놓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서 모두 불러서 얘기한 거야. 잘 한 사람은 스스로 알 거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릴 적 공포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예전에 국민학교 다닐 때, 호랑이 담임 선생님에게 단체 기압 받던 생각이 났다.


모두 운동장으로 나가.

엎드려뻗쳐.

운동장 열 바퀴.

모두 책상으로 올라가.

눈 감아.

손들어.


교실에서 누군가 한 명이 잘못하면 모두 함께 단체 벌을 받곤 했는데... 그 벌은 왜 받았을까. 나는 그런 벌을 아이들에게 내렸다. 고함과 함성과 잔소리를 모두에게 퍼부었다. 효율적인 교육이라는 잘 포장된 이름을 붙여서 말이다.



그러나 지행합일 잔소리 교육의 효과는 뛰어났다. 수건이 얼마나 착착 가지런히 잘 걸리는지 몰랐다. 매일 잘 정리된 수건 건조대를 보며 얼마나 감탄을 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과연 공포와 다그침의 교육이 옳은 것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국민학교 선생님이 단체 벌을 내리면 얼마나 억울했던가. 새록새록 떠오른 어린 기억 속으로 돌아가 내 아이의 마음을 짐작해 보았다. 다음번에 그런 기회가 다시 생긴다면 베란다 세탁실에 24시간 감시의 눈길을 보낸 후 범인을 색출해 개인 교육을 하는 것이 좋을까. 개인 밀착 과외 생활 교육?



아이들은 가정이라는 환경 속에서 배운다. 아이들만 배울까, 나도 아이들 속에서 배운다. 어떻게 무엇을 배울지 내 책임이 막중하다. 모두의 책임이 막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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