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머리 한 올 떨어지더라

by 눈항아리

책상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가느다란 은빛의 실오라기는 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바느질함 속 실패에 잘 말아놨던 투명실의 귀퉁이가 잘려 나온 걸까. 뚜껑까지 꽉 닫아놓은 작은 함에서 탈출한 낚싯줄 같은 실은 씩씩하게도 정처 없이 여행 중인가 보다. 설마.


애써 부인해 보려 해도 하얗고 투명하고 짧은 실은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그래 내 머리카락이구나. 검은 머리 흩날리며 무수히 떨어질 때는 ‘어이구 머리카락! 허구한 날 빠지네.’ 볼멘소리를 해댔어도 하나도 아깝지 않았는데. 흰 머리카락 하나 빠진 걸 들고, 내 것이 아닐 거야 부정하고 노려보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어느 책에선 흰머리가 아니라 검은 머리에 흰머리가 솟아나 마구 섞인 나와 같은 머리를 ‘후추 뿌린 머리’라고 묘사했다. 그 문장이 찰떡이라 생각하고 나서부터 내 머리는 후추 뿌린 머리가 되었다. 흰머리와 까만 머리가 뒤섞인,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나 늙음의 기로에 서서 한쪽으로 기울어가고 있는 내 머리. 정체성의 혼란기에 있는 것처럼 머리 색깔 하나로 기분이 들쭉날쭉한다.


아침에 드라이를 하고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내렸다. 푸석하고 붕 뜬 곱슬머리는 흡사 커다랗게 부푼 버섯 같아 보였다. 자연스럽게 양쪽으로 나뉜 앞머리는 ’s’ 자를 뒤집어 놓은 유려한 곡선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유독 앞머리 안쪽이 하얗고 멋스럽게 휘어져 있었다. 흡사 애쉬그레이라고 해도 좋을만한 색감이었다. 애쉬그레이로 머리를 염색을 하려면 탈색을 몇 번이나 해야 하는데 나는 자연으로 염색을 한 셈이다.


빗으로 가볍게 빗어넘기고 손으로 살짝 만져보고 거울에 머리를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오! 고귀한 색감.


그러다 딱 눈에 띈 머리카락 한 올! 그 머리카락은 정수리에서 삐져나와 하늘을 향해 솟구치고 있었다. 삶이 고단하였는지 곧바르게 직진으로 가지 못하고 잔 물결 일듯 일렁이고, 가장 작은 파마 롤을 만 듯 꼬불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그 머리카락이 까만 머리통 사이에서 태어난 흰 머리카락이라는 사실이었다. 얼마나 주목을 받고 싶었으면 삐죽 튀어 올랐을까.


꼬부랑 흰 머리카락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는 의미로 엄숙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하얀 머리카락 한 올 잡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모두 뒤로 발을 뺀 상황에서 홀로 돌출 행동을 하는 녀석 하나를 잡아채는 일이니까.


차분한 까만 머리통을 피해 꼬불거리는 흰색 머리카락 한 올을 손가락으로 살짝 집어 확 뜯었다. 그러곤 잘 뜯겼나 보려고 머리카락 뜯은 손을 눈앞에 들이밀었다. 바늘귀를 눈앞에 가까이 두고 보는 것과 같은 모양새다. 그런데 웬걸. 흰머리 한 올과 더불어 두 가닥의 까만 머리카락이 손에 붙잡혀 있었다. 아까워서 어쩐다냐. 내 까만 머리.


그 머리카락 세 가닥을 붙잡고 아쉬움과 서러움을 삼키고 있는데 마침 옆에서 불어오는 뜨끈한 바람. 드라이기의 강력한 입김에 그만 빠진 머리카락이 후드득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미 뜯긴 머리카락을 붙일 것도 아닌데 왜 아까운 것인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길로 바닥에서 먼지와 뒹구는 머리카락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원망의 눈초리로 찌릿 드라이기를 노려보고, 드라이기 든 딸아이 검은 머릿결을 부럽게 바라보았다. 흑비단이 저런 빛일까.


방바닥에 하나 둘 떨어진 흰머리가 이제는 눈에 띈다. 내 까만 머리에 붙어 있을 때는 밉살맞기만 하더니 떨어진 머리카락에 왜 없던 정이 생기는 것일까. 하긴 같이 빠진 까만 머리는 더 아깝다.


바닥에 떨군 하얀 머리카락만 밟히는 게 아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주례사의 단골 문구가 떠오르고, 백발 마녀, 은발 신사, 백수광부 등 안 쓰던 말들이 줄줄이 내 눈과 마음에 밟힌다. 책에서 후추 뿌린 머리가 확 눈에 띌 게 뭐란 말인가.



나는 머리가 하얘지지만 누구보다 풍성한 머릿결로 자신감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탐스러움도 내려놔야 한다니. 까만 머리 되라고 밥에 섞어먹던 까만 콩 대신, 탈모에 좋은 음식을 알아봐야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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