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식을 참아라, 딱 100일만

8 엄마 혼자서 뭐 먹어요?

by 눈항아리

따끈한 밥이 밥솥에서 하루를 보냈다. 보온 상태로 오늘 밤을 넘기면 내일은 못 먹을 밥이 된다. 밥솥의 전원 코드를 뽑고 뚜껑을 열었다. 주걱으로 남은 밥을 퍼서 그릇에 담았다. 내일 볶음밥 해 먹으면 되겠다.


밥 한 그릇을 가득 퍼 담아 싱크대 위에 놓고 다시 주걱을 들었다. 스테인리스 내솥에 붙은 밥풀을 싹싹 긁어 한 숟가락 정도를 만들었다. 주걱채로 입으로 가져가 밥풀을 뜯어먹었다.


밥알을 한 입 넣고 우물우물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 갑자기 큰아들 복동이가 큰 소리로 물었다.


“엄마 혼자 뭐 먹어요?”


순간, 나는 뜨끔했다.

나도 모르는 새 내가 뭘 먹고 있는 거지?

순간, 나는 시간을 인지했다.

밤 10시 30분, 밤이 분명한 시간이다.

순간, 나는 상황을 인지했다.

밥 한 숟가락에 불과하지만 음식을 먹었다.

순간, 나는 내 행동의 이유를 물었다.

무의식.

순간, 나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싱크대로 달려갔다.

입에서 우물거리던 밥알을 쏟아냈다.

순간, 푸하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배꼽이 빠지게 웃는 것 같기도 하고, 꺼이꺼이 우는 것 같기도 했다. 데굴데굴 구르며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고 딸아이 복실이는 무슨 일인가 하여 달려 나왔다. 야밤에 뜬금없이 뭔가를 맛있게 먹다 말고 뱉어버린 이상한 엄마.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큰아들 복동이는 무슨 영문인가 하였다.


딸은 나에게 왜 밥을 먹었는지 물었고, 아들은 나에게 밥 한 술을 그냥 먹지 왜 뱉었는지 물었다. 나는 무의식 중에 벌어진 일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면서도 오래도록 남아있는 밥맛의 허전함을 곱씹어 보았다.


짓이겨진 채 입안 가득 굴러다니던 밥알의 풍미.

씹을수록 고소해지는 은은한 단맛의 질척거림.

조금씩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달큼한 밥 물.

후드득 입에서 쏟아지던 내 아까운 밥알들!



자각한 순간 음식을 입안에 물고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약속을 지키고야 마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순식간에 얼떨결에 뱉어버린 내 한 술 밥이 아쉽고 아깝고 눈에 밟혔다.



고작 야식을 하나 줄였는데 어떻게, 무엇을 먹을 것인가 고심하게 된다. 음식 하나를 먹더라도 맛있게 예쁘게 분위기 있게 먹고 싶다. 갑자기 음식의 맛을 평하는 고상한 미식가가 된 같다. 누가 근사한 요리를 짜잔 식탁에 놔주면 좋으련만 나는 주부라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미식의 세계를 재료부터 새로이 경험한다.



점심에는 정성을 들였다. 짠 김치에 돼지 목살 두 덩이를 넣고 정성 들여 볶았다. 양껏 넣고 만든 6인분 음식이 아니었다. 작은 냄비에 두 명이 먹을 수 있는 적당량으로 맛있게 만들었다. 그런데 김치가 너무 짰다. 고기를 더 넣을 걸 그랬나. 밥 한 공기를 다 비웠지만 만족스럽지 않은 점심이었다.


저녁엔 더 근사하고 더 맛있는 밥을 먹어야지 했다. 콩 한쪽을 먹어도 우아하게 먹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야밤에 주걱을 들고 밥솥에 들러붙은 밥알을 긁어먹으면서 나는 꽤나 만족스러웠다. 만족스러운 맛이란 맛있는 것, 예쁜 것, 근사한 것을 먹는 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중일지라도 간절히 원할 때 먹는 음식, 천천히 음미하면서 느끼는 맛이 아닐까.


목마른 자에게 물 한 모금이 생명수이고, 가뭄에 만난 한 방울의 빗방울이 소중한 것처럼. 배고픈 자에게 밥 한 숟가락은 은혜이다. 배고프지 않은 상태로 밥 한 술의 은혜를 깨달았으니 좋은 공부를 한 셈이다.



아들의 한 마디가 무서웠지만 오늘도 무사히 지나갔다. 깜짝 놀랐지 뭔가. 나의 무의식을 항상 경계하자.



주걱을 입에 넣게 만드는 무의식, 밥풀때기를 뜯어먹게 만드는 무의식, 밥 한 술을 오물거리게 만들었던 무의식. 놀람과 의식으로 넘어오는 순간 그리고 느꼈던 행복하고, 맛있었던 짧은 순간.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그리고 맛의 경계를 넘나들며 오늘도 나는 야식을 철통 경계하였다.


오늘도 무사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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