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만족을 모르는
야식 참기는 간식과 밥에 대한 기록으로 연결되고 있다. 낮에 얼마나 만족스럽게 먹었느냐에 따라 야식의 참기의 향방이 결정된다. 극단적으로 뷔페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아침부터 과일을 챙겨 먹었다. 과일 하나를 챙겨 내 입속에 넣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딸기는 시큼했고 과육이 치아를 건드는 순간 시림과 기분 나쁜 질척거림이 따라왔다. 바나나는 껍질에 푸릇한 기운이 남아 있었는데 그나마 단단한 과육이 마음에 들었으나 바나나 본연의 단맛이 느껴지지 않아 아쉬웠다.
점심은 배추 된장국이 좋았다. 된장국 위주로 먹는데도 얼마나 맛있는지 몰랐다. 뱃속이 편안해졌다. 구수하고 얼큰한 국물에 반해 버렸다. 우습게도 내가 끓여 놓고 그런다.
오후 간식으로 짱구 과자 한 봉을 남편이랑 나눠 먹었다. 커다란 과자 봉지를 뜯어 카운터 아래쪽 손이 잘 닿게 놓았다. 남편이랑 나란히 앉아서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손님이 등장하면 둘 다 얼굴 근육이 멈췄고 씹어 먹는 소리도 멈췄다. 나중에 들어보니 대여섯 걸음 앞에서도 그 소리가 다 들렸다. 우리 고객님들이 얼마나 웃었을까. 실컷 먹고 나서 남편은 과자가 너무 느끼하다고 했다. 나는 남은 과자 한 알까지 탈탈 털어서 다 먹었다. 알뜰살뜰 내조의 여왕이다. 오랜만에 만족스럽게 먹은 과자였다.
맛도 맛이지만 양도 만족스러워야 한다. 나는 과일의 단맛보다 설탕의 단맛에 익숙하다. 배가 부르도록 먹어야 만족을 한다. 배가 부르다고 만족을 하는 건 맞겠지?
오후 간식으로 셋째 달복이에게 줬던 모닝빵, 나도 계속 먹고 싶었던 모닝빵 샌드위치를 밥 먹기 전에 두 개 만들어 먹었다. 큰 아이 복동이는 밥을 먹고 네 개나 먹었다.
저녁엔 장 봐온 것을 이것저것 요리했다. 밥 준비를 하면서 음식 냄새를 맡으면 냄새로도 먹는 것이 아닌가? 음식 냄새로 샤워를 하고 나서도 저녁밥을 양껏 먹었다. 빵으로 배를 채우고도 그랬다.
배가 부르다. 그런데 잠자리에 누워서 배가 고팠다. ‘꼬르륵’ 소리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아니, 상황 파악을 잘 못하는 걸까? 꼬르륵거리는 소리는 허기가 몰려와서 나는 소리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음식을 먹어서 배가 부른 건 지속 시간이 있다. 음식을 먹고 일정 시간이 지나 또다시 채워주지 않으면 먹을 걸 달라고 신호를 한다. 부른 배는 산만해도 배가 고픈 건 또 다른 문제다. 소화력이란 대단해서 그런가? 그 많은 음식을 다 소화시키고 뱃살로 옮겼을까? 그 짧은 시간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아니면 계속 먹을 것을 달라는 뇌의 속임수일까? 나를 굴러가는 곰으로 만드는 것이 뇌의 목적일까.
배꼽시계는 그리 정밀한 기능을 갖춘 게 아닌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 울려라.‘ 이렇게 간단한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꼬르륵’ 소리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배가 고픈 게 아니다. 그저 생체라는 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알람일 뿐이다. 그렇게 받아들이자. 신호에 속지 말자. 나를 먹이기 위한 몸과의 사투는 계속된다. 뭔가 이중인격이 된 것 같은 상황.
싸움을 한다면서 왜 낮에는 그리도 많이 먹여댔는지. 원.
야식을 참기 위해 낮 시간의 먹거리에 집중하고 있다. ‘참다’와 ‘잘 먹다’가 공존하는 하루는 어딘가 좀 이상하다. 배가 고프지 않는데도 먹고 싶은 욕구 또한 뭔가 많이 이상하다.
나는 배가 불러도 만족을 못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이 생체 시스템 때문이든 아니든 뱃살에게는 위험한 일이다.
<야식을 참아라, 딱 100일만>은 초등 딸아이 복실이와 함께하는 야식 참기 프로젝트입니다.
셋째 달복이는 밤중에 딸기와 우유를 먹고 초코하임 하나를 먹었다.
둘째 복이는 운동 전에는 늘 먹는다. 밥에 참치, 김, 들기름 등을 비벼서 한 그릇 먹고 밤새 운동을 했다. 철봉의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계속 났다. 둘째는 ‘먹고 운동하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야식으로 먹은 음식을 다 소화 시키면서 운동을 하고 최대한 늦게 자는 게 전략이다. 소화가 전략인지 늦게 자는게 전략인지 헷갈릴 뿐이다.
아무튼 복실이와 나는 야식 먹는 남자 둘은 절대 안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