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은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작아져.
연필의 본분대로 살다 보면 서서히 작아지는 거야.
까만 심을 문지르고 문질러서
닳아 없어진 심을 꺼내 보이기 위해
나무를 깎아내서
연필깎이에 넣고 돌려서.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
1년 정도 필통에 넣고 다니면 작아져서
손안에 쏙 들어오는 연필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
그래 그 연필깎이가 문제였어.
새로 산 연필깎이는 책상에 놓는 크기가 아니었어.
필통에 넣으면 좋을 크기
필통이 좀 불룩해지겠다 싶은 몸통을 가지고 있었지.
연필심이 부러져서
마침 연필깎이를 찾았어.
단단한 플라스틱을 손바닥으로 거머쥐고
연필의 한쪽 끝을 구멍에 맞춰 넣었지.
연필을 계속해서 돌렸지.
또 돌리고 돌렸지.
언제까지 돌려야 하지.
나는 알지 못했어.
영어 공부는 하기 싫고
엄마는 잠시 자리를 비웠고
연필은 계속 돌아가.
시간이 흘러가는 것도
연필이 작아지는 것도
신이 나.
동생 복실이가 구경꾼이 되었어.
복실이는 깔깔거리며 웃었어.
나는 막대기 위에 접시를 놓고 돌리는
묘기를 부리듯
연필을 돌리고 돌리는 거야.
문이 열리고 엄마가 나타났어.
연필은 딱 멈췄지.
돌아가는 것도 작아지는 것도.
연필은 내 손을 떠나 엄마의 손으로 옮겨졌어.
딱 보니 어이없는 거야.
새 연필이 짜리몽땅 몽당연필로 변신한 거지.
잠시 잠깐 엄마가 책상 앞을 비운 사이에 말이야.
엄마의 얼굴이 울그락 푸르락 하더니
어이없는 표정으로 한참을 노려보더니
엄마의 목에서 돌멩이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어.
한 덩이, 두 덩이 마구 던져진 돌덩이가 굴러 다녀.
나는 뭘 하고 있었지?
나는 연필을 깎고 있었지.
연필이 부러져서 깎고 있었을 뿐이라고.
나는 사실 영어 공부 중이었어.
엄마가 단어 쓰기를 시킨 거야.
쓰려면 연필이 필요하니까.
엄마는 연필 상자를 꺼내 새 연필을 줬어.
한 다스에 12개니까
아직 많이 남았어.
언제 다 쓰지?
새 연필은 곱게 깎여 있어.
놀라운 사실이지.
그건 연필을 통으로 사다 준 고모의 손길인지
연필 공장 공장장의 손길인지는 알 수 없어.
연필깎이에 넣기만 하면 되는 건데.
깎인 연필이라니.
아쉽게 되었지.
연필이 없으면 영어 스펠링을 안 쓸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연필깎이에 연필을 넣고 마구 빨리 돌릴 걸 그랬어.
아니지, 그래도 새 연필이 나오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거니까.
연필 타령을 멈추고
영어 단어를 썼지.
새 연필이 손에 착 감기는 게 술술 글씨가 써져.
열심히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해.
글씨가 빨라졌지.
엄마가 옆에 버티고 서 있는 한 나는
목줄 쥔 주인의 눈치를 보는 강아지 신세야.
깨갱.
엄마는 작아진 연필을 들고 연필깎이를 들었어.
엄마도 묘기를 선보일 모양인가 봐.
연필을 돌렸지.
돌리고 돌리고 계속 돌렸지.
연필이 더 작아져.
우와 엄마 대단하다!
복실이와 나는 박수를 치며 웃었어.
엄마의 표정이 구겨졌어.
연필을 꺼내니까 글쎄,
까만 연필심이 주삿바늘처럼 뾰족한 거야.
날카로운 게 금방 부러질 듯 위태로웠어.
엄마는 다시금 연필을 구멍에 넣었지.
다시 꺼낸 연필은 심이 부러져 있었어.
엄마는 넣고 돌리고 넣고 돌리고를 반복했어.
연필을 깎고야 말겠다는 투지를 불태우며
강렬히 돌렸어.
얼굴은 험악하게 변했지.
그런데 한순간 엄마의 얼굴이 웃고 있는 거야.
“이거 왜 자꾸 돌아가지?”
드디어 엄마가 연필깎이의 원리를 터득했나 봐.
깎으면 작아지는 거지.
연필은 계속 작아지고 있었어.
엄마도 손을 멈출 수가 없었지.
언제까지 돌아갈까 궁금했던 거야.
나도 그랬거든.
절대 영어 글씨가 쓰기 싫어서 그랬던 건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