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식을 참아라, 딱 100일만

35 이상한 기준

by 눈항아리


8시 4분이었다. 시간을 확인한 이유는 야식 참기를 하며 8시라는 시간을 한번 언급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큰아들은 8시 이후에 먹는 것이 야식이라 정의한 바 있었고, 나는 저녁 식사 시간을 8시 이전으로 잡았다. 숫자는 기준이 된다. 때로는 내용은 쏙 빼먹고 그 숫자를 아무 데나 갖다 붙이기도 한다는 게 함정이다.


“우리 맥스봉 하나만 더 먹을까? 내일 먹을까? ” 소시지를 꺼내 보이며 복실이에게 물었다. 나에게 묻는 소리였고 복실이에게 동의를 구하는 물음이었다. 소시지와 복실이 사이에서 나는 우물쭈물하며 먹고 싶은 티를 팍팍 냈다.


“엄마 괜찮아. 하나 정도는 괜찮아. ” 복실이가 너그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이미 ‘먹는다’는 선택으로 의견이 기울었다는 걸 아이도 알아챘다.


소시지가 있는 곳을 찾은 순간 나는 먹겠다 결정한 것과 다름없었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먹자는데 아이가 마다할 리가 없었다. 아이는 늘 간식이 고프다.


“너무 늦은 거 아닐까? 8시 넘었지? ” 그러면서 시간을 확인한 것이다. 저녁을 먹고 물 이외에 아무것도 먹지 말자고 다짐해놓고 8시라는 기준을 어디서 뚝 떼와 대충 얽어 붙였다.


“이제 8시잖아. 먹고 자전거 5분 더 타면 되잖아.” 아이는 나를 위하는 척하며 엄마가 어서 소시지 간식을 꺼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럼 얼른 하나만 먹을까? ” 얼른 먹으면 8시 전으로 돌아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굴었다.


복실이에게 소시지 하나를 건네고 나도 하나 집어 들었다. 껍질을 까서 한 입 깨물고 또 한 입 깨물었다. 빨리 먹어야 하는 와중에도 맛을 봐야 했다. 줄어드는 소시지가 아까웠다. 작은 소시지 하나를 한 입에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 입에 나누어 꼭꼭 씹어 먹으며 8시 4분이 아니라 8에 가까운 시간이라고 세뇌를 시켰다.


소시지를 뱃속에 감추었고 그걸 감쌌던 비닐을 쓰레기통에 넣기까지 채 5분이 안 걸렸다. 소시지를 다 먹고 복실이와 나는 완전범죄를 저지른 것 같은 미소를 교환했다. 그건 행복한 일탈의 미소였다.


소시지 하나가 뭐라고 뱃속에 기별도 안 가는데 괜히 마음에 불을 질렀나.


퇴근 시간이었다. 9시가 한참 넘은 시간이었다. 아이들을 태우고 집으로 운전해 가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둘째 복이가 혼자 뭘 까서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껌이면 나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껌은 먹는 것 아니고 씹는 거니까. 삼키는 거 아니고 치아 운동 아닌가.


“나도 하나만 줘.” 복이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꺼내더니 하나 내민다.


“이거 껌 아니야?”


"캐러멜이야."


“그래도 하나 줘. 내일 먹게.” 아쉽지만 캐러멜은 먹을 수 없었다. 씹어서 모두 뱃속으로 삼켜지기 때문일까. 껌도 단물이 쪽 빠져 뱃속 들어가는데 껌은 되고 캐러멜은 왜 안 되는 걸까. 이상한 기준이다.


집에 도착해 책상 위에 올려놓은 캐러멜 하나를 보며 고민했다. 먹을까 말까. 지나가던 복이가 그런다.


“드세요. 하나 더 드려요?”


“내일 먹게 하나만 더 줘.” 먹을지 말지 고민하면서도 우선은 쟁여놓고 보는 것이다. 욕심꾸러기.


나는 생각했다.

‘아까 소시지만 안 먹었어도 캐러멜 먹을 수 있었는데. 아쉽다. ’


소지지는 먹었고 캐러멜은 책상 위에 남았다. 캐러멜을 보며 계속 속삭인다.

‘먹고 죽은 귀신 때깔도 곱다는데, 먹는 게 남는 거다, 입이 즐거워야지,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게 인생이라고, 인생 뭐 있어. ’

내 속에 악마가 백 명은 사는 것 같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선택의 기준은 내 구미에 맞게 떼었다 붙였다 하는 포스트잇과 같다. 이상한 기준이다.


그런데 이런 작은 일탈이 사람 사는 쫀득한 재미가 아닐까? 이건 절대 먹기 위한 변명은 아니다.


<야식을 참아라, 딱 100일만>은 초등 딸아이 복실이와 함께하는 야식참기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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