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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보나 Jun 26. 2024

핑계없는 무덤 없다

남편이 가게 반찬통을 정리해서 집으로 날랐다. 불량 주부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세심한 남편이다. 반찬 통은 뚜껑에 고무 패킹이 달려 있는 유리 밀폐용기가 대부분이다. 가게 주방에 쌓이기만 하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그들을 차곡차곡 쌓아 김치통에 넣어 집으로 데려다준 것이다. 깔끔하기도 하지.


우리 집 김치통만 가지고 오라니 어머님 댁 김치통까지 또 집으로 날랐다. 네 통 중 둘이 다른 통인데 그것이 안 보이나 보다. 김치통 색깔과 이름이 구분이 안 되는 신기한 1.5, 1.2의 눈을 가지고 있다.  김치통이야 내 차로 한번 더 실어 나르면 된다.


문제는 밀폐용기다. 차곡차곡 쌓아 넣은 유리용기 들 짝이 없다. 뚜껑이 열린 채로 서로 다른 크기의 그릇들이 삐뚤빼뚤 그러나 차곡차곡 쌓여있다. 뚜껑이 몇 개 없다. 패킹도 몇 개 없다. 맞으면 문제가 없으나 몇몇 그릇과 뚜껑은 또 따로따로 가게에 있다. 많이 부족한 마음이지만 그래도 날라다 준 정성을 생각해 한 마디만 했다.


유리용기 따로, 플라스틱 뚜껑 따로, 고무 패킹 따로. 짝이 맞지 않아 서로 만날 수 없는 그 느낌 아실랑가? 모르시면 마음부자.


그런 고로 반찬을 해도 담을 그릇이 없어 밥 할 생각이 쏙 들어간다. 반찬통 뚜껑이 착착착 맞아야 정리를 해서 주방 수납장에 넣어나 놓지. 뚜껑이 없어 바닥에 김치통 4 개를 쌓아 놓고 뚜껑이 맞는지 반찬을 할 때마다 대 본다. 아이고야. 내 뚜껑 이제 만났구나. 이산가족 상봉이 따로 없다.





일요일엔 닭 삶을 냄비를 구비해 놨다. 가게에 가 있던 것을 닭을 삶아 먹으려고 집으로 데려온 것이다.


닭 한 마리와 북채를 사 왔다. 푹 끓여서 닭국을 먹으면 좋겠다. 김치를 척 얹어서 먹으면 좋겠다.


그런데 어쩌면 좋을까. 오매, 김치를 통째로 가게 냉장고에 넣어 놓고 깜빡했다. 반찬통에 덜어 온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냥 온 것이다. 그러나 주부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의지의 아줌마다. 김치가 없으면 김치 친구를 만들어 먹으면 되니 걱정 없다. 아삭아삭 오이도 있고 고춧가루도 많으니 어찌어찌 만들어 먹으면 된다. 닭국에 파, 마늘, 양파 때려 넣고 푹 삶아 고춧가루 팍팍 뿌리고 후춧가루 팍팍 뿌려 먹으면 된다. 좀 심심하면 오이를 씹어 먹으면 된다.


그런데 날이 후줄근해서 그런가, 밤사이 비가 많이 와서 그런가, 바깥 날씨가 칙칙하니 집에 손님이 들었다. 올해 세 번째 왕지네가 출현했다. 지네의 출현 현장은 늘 주방이다.


난 몰라!


늦은 점심을 먹고 늦은 저녁을 할 참이었는데, 닭을 삶아야 하는데 어쩌나. 닭뼈를 좋아한다는 지네를 봤으니 주방 근처에는 가기도 싫다. 닭은 절대 삶을 수 없다. 곱은 발바닥으로 방바닥을 디디지도 못하고 살금살금 걸었다.


난 밥 못해요.
오늘 저녁은 그냥
바나나랑 과자 먹어요.


싱크대에 올려둔 닭은 복동이에게 냉장고로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그날 밤까지 주방과 주방으로 이어지는 화장실 출입을 못하였다는 불량 주부. 냉장고 앞에는 징검다리를 만들어 두었다. 빨강 미니의자 징검다리.



자꾸 마음이 쪼그라드는 불량주부

탈출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뱅뱅 도는 듯하다.

탈출 과연 할 수 있는 것일까. 살림의 여왕이 되기는 요원해 보이고 이곳저곳 찔러보아도 핑계만 쌓인다.

라면을 며칠 사오지도 끓이지도 않았다. 대신 자장면, 짬뽕을 한 번 더 시켰고 치킨, 피자를 먹었다. 복동이와 복이는 할머니집에 라면을 끓여 먹으러 간다. 자연스레 손자의 방문 결과를 만들어낸 불량주부가 진정한 효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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