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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보나 Jun 30. 2024

쉬어가자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손은 저릿하고 다리마저 들어 올리기가 힘들다. 갑상선에 또 변화가 있는 걸까. 심장은 멀쩡하다. 병원에 가본 지 너무 오래된 것일까. 무기력증, 번아웃이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갱년기가 오나? 호르몬에 뭔가 변화가 있는 것 같다. 급 우울모드로 변신했다. 밥 하기 싫다고 이러는 건 절대 아닌 것 같다.


여름이라 일이 많다. 팥빙수를 시작했다. 팥을 삶는다. 수박을 자른다. 과일 구매는 내 몫이다. 어제는 10킬로그램 수박을 들고 가 반을 잘랐다. 다행히 씨가 많이 없었다. 10킬로그램 수박에게 감사의 절을 했다. 여름이라 덩달아 키위주스도 많이 나간다. 키위도 열심히 껍질을 깐다. 여름이라 에이드 종류도 잘 나간다. 에어컨이 추운지 어르신들이 많아서 그런지 차 음료도 꾸준히 잘 나간다. 에이드에 들어가는 각종 수제청 만들기도 내가 하는 일이다. 여름이라 일이 배로 늘었다. 가을에는 일거리가 더 늘어난다. 봄에는 농사일로 골머리를 싸맨다. 겨울이면 일거리가 없이 탱자탱자 놀까? 지난해 억수같이 퍼붓는 눈에 ‘눈삽운동’이라는 새로운 운동 분야를 개척해 냈다.


봄여름가을여울 이제 보니 안 바쁜 계절이 없다. 그저 봄 농사를 조금 소홀히 했더니 여름 시작이 힘든가 보다. 몸이 그래서 안 움직이나 보다. 그래서 마음이 조금 쉬라고 그러나 보다. 그래서 울컥 한 번씩 눈물이 나나 보다.


며칠 마트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저녁도 대충 때웠다. 엊저녁은 돈가스를 시켜 먹을까 하고 전화번호를 찾고 있는데 오토바이 배달 기사님이 흰 봉지를 들고 들어온다. 나보다 먼저 남편이 배달을 시켰다. 족발이다. 할인율이 크다. 편하고 편하다.


야들야들 갈색 껍데기를 상추에 얹었다. 간장과 고춧가루 양념에 무쳐 나온 부추를 얹었다. 빨간 매콤 양념 무말랭이도 척 얹었다. 쌈을 싸서 입에 쏙 넣었다. 배달 쌈족발 맛이 좋다. 말랑살을 골라 다 쌈을 싸 먹었다. 쌈보다 감칠맛 나는 족발 맛. 족발은 뜯어야 맛이다. 손이 더럽혀질 각오를 하고 입 주변 볼까지 돼지기름으로 번들거릴 작정을 했다면 도전한다. 다행히 비닐장갑을 찾아 꼈다. 커다란 족에 얼굴을 들이민다. 살이 없어도 자꾸 물어뜯어 내고 싶은 건 본능일까. 포크와 같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입속에서 하나 꺼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능력이 부족하다. 아직 붙어 있는 것만 같은 살들을 아쉽게도 내려놓아야만 했다. 큰 다리 하나를 뼈다귀 봉지에 고이 모셔두고 이번엔 작은 발을 잡았다. 발인지 어디 뼈인지 알 수 없으나 기름이 좌르르 흐르는 갈색빛 야들야들 살들이 잔뜩 붙어 있다. 역시 뜯어야 맛이다. 돼지뼈를 뜯으며 기분이 살짝 좋아진다.


기분을 업고 일요일 장을 보러 갔다. 이것저것 되는대로 담아왔다. 대충 생각 없이 먹는 날들도 있다.


10시가 넘은 시간 아이들은 할머니 집에서 라면을 먹으려고 했나 보다. 퇴근길에 오른 나는 물이 끓고 있다는 말에 아직 면 투하 전이라는 말에도 준비를 해서 집으로 가자고 했다. 라면이 먹고 싶은 복실이의 칭얼거림과 생떼를 부리는 거대한 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고모 그 라면을 싸주세요.


정신없이 준비를 하고 나오느라 아이들은 라면을 잊었고 고모가 싸준 복숭아 한 봉지가 있었다.


불량주부는 괜히 불량주부가 아니다. 너무 바쁘다. 라면 걱정 할 새 없이 바쁘다. 소파에 빨아놓은 빨래를 일주일간 신경 쓰지 못했다. 집에 와선 빨래 개는 가족들은 신경도 안 쓰고 소파에 널브러져 잤다. 내 방에 있던 이불은 친절한 식구 중 누군가가 아침에 고이 접어 장롱에 넣었다. 누구냐 대체. 청소기만 대충 돌리고 누군가가 이불을 깔아줄 때까지 기다리다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번아웃인지 이웃인지 사이좋게 지내자. 힘이 들 땐 좀 쉬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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