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그녀, 내 발치에 꽃을 피우다

by 눈항아리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소설 속 능소화는 늘 어느 귀한 양반집 아가씨와 함께 등장했다. 내당을 두르는 담장, 어머니를 기다리고, 사랑하는 도령을 기다리는 어느 담장 아래 애틋하게 피어났다. 담장 위에서 아래로 늘어지며 떨어지는 한 떨기 주황빛 송이마다 그리움과 애정을 담아 절절히 피어났다. 소설 속 담장에 피어난 능소화는 그러했다.


옆집 능소화는 거대한 나무다. 줄기 한 가닥을 늘어뜨리는 청초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꿋꿋한 능소화.


서점 가는 길에 빈 전봇대를 휘감고 올라 하늘까지 닿고 싶은 능소화를 보았다. 절박해 보였다. 주변에 사귈 이 하나 없고, 풀밭도 그늘도 없이 삭막한 돌기둥에 기대어 오르는 능소화. 그녀에게서 산악인의 치열한 면모를 볼 수 있었다. 거친 암벽을 기어오르던 능소화.


꽃이 피어나는 자리도 중요하다.


우리 마당 능소화가 꽃을 피웠다. 돌담 위에서 떨어지는 한 떨기 애절한 꽃송이를 원했건만.


그녀는
내 발치에 꽃을 피웠다.



담장을 기어오르고 소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 맵시를 뽐내던 빨간 장미의 영화로운 시간이 지나갔다. 세련된 장밋빛에 기가 팍 죽었을까 능소화 초록 잎들은 어두 컴컴한 그늘 아래에서 땅바닥을 기어 다녔다. 그녀가 담장 가까운 곳에 뿌리를 내렸다면 달랐을까. 그랬다면 빨간 벽돌담을 넘보며 쭉 뻗은 아치형 줄기를 늘어뜨렸을지도 모른다. 빽빽한 초록 잎들 사이에서 삐죽거리는 잎사귀가 누구의 것인지 모르고 지내던 어느 날 능소화가 주황빛 꽃을 피웠다. 하루아침에 만난 그녀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주황빛 능소화

그녀가 축 늘어진다.


무릎까지 오는 정원석을 타고 멋들어지게 늘어진다. 주황꽃이 하늘을 향해 널을 뛰어야 하건만,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로 올라야 하건만. 바닥을 기어 다니며 자라다 널을 뛴 곳이 더 낮은 주차장 바닥이다.


멋지다 능소화야.

너는

낮은 곳에서 더 낮은 곳으로

몸을 낮출 줄 아는

꽃 중 꽃이다.


능소화의 무모한 비상 / 주차장 추락 전



처음엔 수줍은 듯 자꾸 바닥으로 얼굴을 수그렸다. 얼굴을 감추는 그녀를 보려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핸드폰으로 셀카를 찍어줬다.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니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녀의 얼굴이 활짝 폈다.


세상에! 셀카라는 것이 다 있구나. 너에게 손은 빌렸으나 짐짓 얼굴 표정과 매무새를 정돈하고 곱게 찍으니 바닥으로 처박혔던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구나. 파란 하늘도 곱고 주황빛 피어나는 내 얼굴도 곱구나.


둥그런 쇠를 두른 거무튀튀한 고무 내가 얼마나 코 끝을 스치는지, 쿨렁 쿨렁 검은 연기는 왜 그리 날아오는지. 둥그런 돌덩이가 그저 좋아 기대었건만 이제와 무를 수도 없고 자리가 영 마뜩잖다. 여기가 어디인고. 같은 하늘 아래 꽃만 피면 그뿐인 줄 알았는데 내 뿌리는 왜 이곳에 박혀 움직일 줄 모르는고.


능소화 셀카 찍기


미안하다 능소화야. 주차장 바닥으로 추락하는 너를 발견한 것은 나이지만, 네 뿌리를 다독인 건 내가 아니란다. 너의 키가 크다면 튼튼한 초록 줄기를 담장에 척하고 걸쳐둘 수 있도록 내 한 번 힘써 볼 수는 있을 텐데, 지금은 앉은뱅이라 어쩔 도리가 없구나.


키 작은 능소화는 투덜대면서도 여름 한낮의 열기를 품고 더욱 활짝 피었다.


뜨거운 여름 태양 아래

피어난 능소화는

모두 곱다.


담장의 능소화

나무를 타고 오른 능소화

전봇대 능소화

모두 곱고 곱다.


내 발치에 피어난 능소화야

그래 네가 참으로 곱다


그녀도

화려한 비상을 꿈꾸었다.

무모한 도전

그것으로 되었다.


추락하지는 않았으니

마음에 담아준 이가 있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키를 키워 능소화 그녀의 초록 손이 담장에 가 닿을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능소화 활짝 피다

능소화 그녀는 자동차 뒷바퀴가 주차되는 하필 그 자리에 피었다. 초록 풀이 무성한 가운데 혼자 화려하게 피었지만 누구의 눈길도 받지 못했다.(나만 빼고) 누군가 지나가다 발로 툭 차면 한 순간에 떨어질 것 같아 불안했지만 꿋꿋이 버티었다. 오늘은 울창한 숲 속 커다랗고 평평한 바윗돌에 누워 선탠을 하고 있는 듯 여름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바람도 선선하니 그녀는 어깨춤도 추었다.


바람 불던 오늘 어깨춤 추는 능소화




keyword
이전 14화그녀가 있는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