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늦은 퇴근길이다. 할머니 집에서 기다리는 꼬마들을 데리러 가는 발걸음이 유난히 바쁘다. 아이들이 평소 노는 놀이터로 들어가는 길이 캄캄하다. 아파트 단지 주차장을 지나는데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온다. 눈물이 나려는 걸 간신히 잡아 발걸음을 재촉한다.
'왜 이렇게 바쁘게 사냐.'
낮 동안 들썩였을 미끄럼틀을 지난다. 놀이터를 휘돌아 치는 시원한 바람이 눈물을 씻어준다. 참 고단한 하루다.
달복이는 열이나 학교에 못 갔다. 막내 복실이 학교 방과 후 공개수업이 있었다. 학교에 갔다 근처 골목길에 차를 세워 놓고 잊었다. 다 저녁에 차 생각이 났다. ‘차는 왜 버리고 다니냐.' 매일 웃으며 넘어가던 내 깜빡임도 짜증스럽게 느껴지는 밤이다. 아파트 사이사이를 지나 휑하니 부는 바람만이 날 위로해 준다.
할머니 집에서 두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나선다. 골목 양쪽으로 다닥다닥 주차된 차들. 뛰어난 운전술로 쉴 틈 없이 박아놓은 부품들, 제 할 일을 마친 차들이 잠시 쉼을 갖는 골목길. 차야, 길아 너희도 더운 하루 고생이 많았다.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진 골목길을 걷는다.
왼손에 달복이, 오른손에 복실이. 캄캄한 골목길을 걷는 오른쪽이 자꾸 엉겨 붙는다. 손을 잡고 싶은데 자꾸 제 어깨에 내 손을 가져다 올린다. 숫제 자기 맘대로다. 계속 내 손으로 자신을 둘러싸는 오른쪽. 무섭단다. 캄캄하고 어두운 골목길이 아이에게 공포인 것인가.
어린 시절, 자동차도 많이 없던 시절 우리 동네 좁은 골목길에는 가로등이 하나만 있었다. 어릴 때 기억이라 가로등 개수가 정확한지는 모른다. 하지만 가로등 하나만은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 유난히 어두웠던 가로등 하나. 기다란 골목길에 왜 가로등 하나만 달아놨을까. 그 시절에는 매번 생각했다. 좀 촘촘히 여러 개 달아놓으면 안 어두울 텐데... 골목길을 지나 큰길로 나가는 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구멍가게가 있었다. 한 번은 저녁시간 가게에 심부름 갔다 돌아오는 길. 어두침침한 가로등 아래를 빠른 걸음으로 막 지나갔다. 가로등을 지나면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컴컴한 어둠. 너무 무서워서 눈을 감고 내달리다 옆에 세워진 리어카에 부딪혀 넘어졌다. 재빨리 일어나 아픔도 무시하고 집으로 내달렸던, 골목길에 대한 내 어린 날 혼자만의 아련한 기억.
한낮의 골목길은 우리의 푸근한 놀이터였다. 동네 아이들과 땅따먹기, 비석치기, 그림 그리는 동안 뛰어다녀오기,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등 안 해본 놀이가 있을까. 한때는 비포장 흙길이었던 추억의 골목길도 어느 날 시멘트로 덮여버렸다. 그 단단한 시멘트 바닥에 넘어져 무르팍에 상처를 안고 눈을 감은 채 내달리던 아이. 그 겁많던 아이가 이제는 어두운 골목길도 잘 다닌다. 다 컸다.
‘엄마도 어릴 때 골목길이 무서웠어. 괜찮아. 엄마가 지켜줄게.’ 이렇게 이야기해 줘야 하는데 바쁜 하루의 고단함이 말을 막는다. 손을 계속 끌어가는 아이의 접촉이 어두운 골목길 공포에 대한 몸부림이라는 걸 알지만 내 정신은 이미 집에 가 있다. 쉼이라 말하는 그곳.
왼쪽은 가만히 있을 리 만무. 학교, 학원까지 합법적으로 땡땡이치는 신세계를 접한 아이는 행복에 겹다. 열은 나지만 아픈 게 맞는지 의문이 든다. 게임 이야기로 엄마를 초대하기 위해 작업 중이다. “메인 퀘스트를 깼는데 아이템 빨이~~~~이 오연발이~~~”그렇구나. 계속 쏟아지는 수다쟁이의 알아들을 수 없는 세계의 언어는 영어보다 더 공포스럽다. 하지만 간혹 들리는 단어로 맞장구를 쳐줘야 한다. 마지막엔 너무 기분이 좋다로 끝난다. 휴~ 너의 언어를 진심으로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고 놀아주는 아빠한테 가라. 나는 한국말이 좋다. 그래도 너의 재잘거림에 내 피로가 풀리는 듯 붙어버린 오른쪽도 덜 신경 쓰인다. 너의 수다가 엄마에게 약이구나.
학교 앞에 주차된 차에 오른쪽, 왼쪽을 싣는다. 가게에서 신나게 아빠와 자기들 세계에 빠져있는 큰아이들도 싣는다. 틈틈이 애들이랑 진심을 다해 게임해 주느라 고생 많았어요. 재밌었어요? 재밌었겠지요. 재미없으면 안 하는 양반이니.
엄마의 늦은 퇴근으로 아빠랑 비슷하게 집으로 돌아온 왼쪽이는 아빠에게 가 붙었다. 게임 세계 언어를 알아들어주는 말 통하는 아빠가 역시 최고다. 오늘의 위대한 전적을 자랑해야 한다. 아빠는 잠이 든 것 같은데 이제 그만~~. 아이의 수다를 자장가 삼아 잠든 아빠. 아빠에게도 아이의 재잘거림이 약인가 보다. 수면제.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남편씨.
2023년 7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