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쉬고 싶소.
이상한 댓글을 받고서.
내 글을 되돌아보았다. 일기 일색인 나의 글은 무슨 목적으로 쓰는지는 명확하다. 나를 발견하기 위해. 과연 이곳에 게제하는 게 맞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내 집 숟가락 수를 남이 알고 싶을까? 이런 구차한 글을 왜 써서 올리지? 그저 너의 일기장에나 쓰면 될 일을.
나의 수준을 돌아보게 되었다.
두서없는 말들로 보아 개오지라퍼란 말은 누구를 지칭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아이 키우는 일에 유난을 떨며 구구절절이 앵앵거리는 내 글들에 회의감이 들었다. 나에게 개오지라퍼라고 하는 건가. 숟가락은 오늘 글에 쓰지 말 것을.
구제불능이구나.
나는 글이라는 것에 뭣도 모르면서 그저 쓰는 멍청이로구나.
하지만 그 고양이 녀석은 모를 것이다.
그저 쓰는 것이 나에게는 탈출구가 되고, 누구에게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가 된다는 것을. 나에게 글이란 삼시세끼 밥 솥을 부둥켜안고 있다 잠시의 휴식이며 산책이며 외출이다.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쉼이다. 폄하하지 말라. 숟가락 수가 필요 없다고 말하지 말라. 그렇다면 우리 집 말고 다른 집 숟가락 개수를 세거나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서 놀면 될 일이다. 썩 꺼지시오.
아침에 나를 깨우는 것은 밥순이 엄마가 아닌데. 왜 나는 밥타령, 아이들 타령만 하며 삶이 힘든 것을 이야기하는가. 내 생각이 좁고 좁아서. 쓸 것이라고는 아는 것이라고는 너무나 빈약한 인간이라서 그렇다. 그러나 돌고 돌아 나를 발견하는 일이 지금 내 가족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1년의 글쓰기를 통해 알아가고 있다. 아이들을 빼고 남편을 빼고 나를 말할 수 없다. 그 속에서 나의 존재를 찾아가는 것이 내가 지금 가는 길이다. 누가 뭐랄 것인가.
밥 하는 엄마,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 누구나 자신을 찾기 시작하는 때가 온다. 우울감이 시작되었다면 그것이 첫 신호다. 첫 아이 때부터 꾸준히 시작된 우울감이었지만 그것이 신호인 줄 몰랐을 뿐이다. 나를 구속하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더 많은 우울감 속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지도 모른다. 구속의 족쇄를 차고 옴짝달싹 못할 때가 오면 결정해야 한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이곳에 일기 나부랭이 같은 글을 올리기로 했을 뿐이다. 이것이 맞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으나 숨 쉴 구멍이므로. 내 구멍을 틀어막지 말기를 바란다.
제발!
내 절규가 들리지 않는가. 웃으나 웃는 것이 아닌 툭하면 터질 것 같은 눈물의 세월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냥 조용히 지나갈 주기를 바란다.
남편은 나에게
감성이 풍부해져서 눈물이 많아졌다고 한다. 감성이 풍부해져서 민감도가 많이 올라가서 지나가는 길고양이 한 마리에게도 마음이 쓰인다.
그저 조용히 지나가 주시오. 나는 그저 나의 길을 갈 테니. 우리집 숟가락을 알 필요 없소. 당신의 숟가락 개수도 알고싶지 않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