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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주부, 평범을 누리다

by 눈항아리

돌아온 주부

11월 11일 <태산을 옮기다>


주부가 쉬는 동안 우여곡절 끝에 빨려 나온 빨래들은 소파에 두 무더기, 건조기에 한 무더기가 있었다. 베란다 빨래터에는 두세 번은 돌려야 할 빨래가 쌓여 있었다.

울 샴푸로 빨았던 빨래는 아이들 학교에 입고 갈 옷인데 다시 세탁기에 넣을 시간이 없다. 그냥 세제 범벅이 된 옷을 하루는 입고 가야 할 듯하다. 세제가 몸에 안 좋을 텐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프고 난 후 일어나니 거실은 난장판이다. 평소와 같다. 주방은 그나마 봐줄만 하였다.


그러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집안 구석구석에 희극 소재가 넘친다. 남편이 밥 먹기전 쌓여있던 설거지를 미리 식기세척기에 넣어두었다. 식기세척기에 설거지한 냄비를 복이가 그냥 꺼내 라면을 끓였다. 그릇도 그냥 꺼내 사용한 것이다. 라면을 다 먹고 난 후 알게 된 그들은 먹은 것을 도로 뱉을 수도 없었다. 많이 찜찜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 우리 집은 희극 무대다. 장래에 개그맨을 많이 배출할 것 같다.


대파가 나의 책상 위에서 뒹굴고 라면 봉지가 책상과 의자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휴지통은 넘쳐나 보이고 곳곳의 먼지가 눈에 확 띄었다.

그런데 이런 지저분하고 평소와 다른 집안의 모습이 다른 식구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다. 그건 확대경, 망원경 등 특수 안경이란 안경은 모두 달아 놓은 주부의 눈에만 보이는 세계다. 주부에게는 아주 사소한 영역이 저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건 살림이란 그들에게 관심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어휴. 알면서 한숨은 무슨.

돌아온 주부는 집안 곳곳에 달라진 점을 복구해 나간다. 내 책상 위에 올려진 대파부터 치웠다. 라면 봉지도 치웠다. 우선은 앉아야 하니. 다른 건 밝으면 빠르게 치우기로 하자.

쓰레기봉투가 필요하다.





평범을 누리다


11월 12일 <태산을 옮기다 41일 차>

세 무더기의 빨래를 갰다. 그리고 소파에 앉았다. 책을 읽었다. 복실이도 앉았다. ‘이런 게 정상이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생활이란 대단한 노력의 결과다.


살림의 기적 40여 일 만에 찾아온 정상적인 소파 생활. 자연스럽게 책을 가져와 복실이와 앉아 책을 읽는 이런 평범함.


그래 난 이런 걸 원했어.


​평범함이란 누군가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아프고 나서 느끼는 평범한 일상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퇴근 후 남편은 들깨를 씻고 복이는 로라를 타러 갔다. 나는 시험이 끝난 복동이와 함께 빨래를 갰다. 장난꾸러기 꼬마들은 양치를 하며 계속 저희들만의 놀이에 빠져 있었다.

일상이란 참 좋은 것이다.

복동이가 물었다. 지난번 복실이도 물었었던 물음이다.

“엄마 왜 빨래를 개? 안 개도 되잖아. ”

“이제부터 빨래 개고 살려고. ”

아이에게 멋진 말은 못 해 줬다. 하지만 덧붙여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엄마도 평범하게 살려고, 소파에서 앉아 쉬는 평범한 일상을 누리고 싶다. ’

평범함이란 좋은 것이다. 평범하게 살려고 이렇게 고생을 하는가 싶기도 하다. 그저 평범하기 위해 이렇게 이렇게 애를 쓰며 산다. 평범하기 위해 나는 태산을 옮긴다. 태산을 옮긴 지 41일 차 주부, 소파에 앉아 ‘평범’을 소중하게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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