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서 잊힌 기억들
그간 적적했다. 잊힌 것이 없어 기회만 엿보고 있던 깜빡이가 저녁에 찾아왔다. 종일 편하게 쉬었더니 심심했나 보다. 나의 친구 깜빡이가.
저녁밥을 했다. 쌀을 씻어 밥솥에 넣고 취사를 눌렀다. 치이 이이익! 평소와 다르게 더욱 경쾌한 수증기 소리, 곧이어 찾아온 밥솥의 수증기 사태를 맞이했다. 밥솥과 나의 거리는 정말 30센티미터인데, 책상에 앉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욕설의 리얼리즘’을 읽고 있었다. 거기엔 진짜 리얼한 욕은 안 나오지만 수증기 환장의 파티 현장을 30센티미터 앞에서 목격하고 욕설이 튀어나올 뻔했다.
남편을 불렀지만 남편은 ‘포트나이트’의 세계에 푹 빠져 있었다. 주방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게임에 초집중을 하고 있었다. 물방울 가방처럼 생긴 눈 달린 아이를 하나 등에 매달고 총을 들고 온 산을 뛰어다니며 총질을 해대고 있었다. 남편을 애타게 부르는 부인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겠지.
먼저 사태를 파악해야 했다. 거대한 수증기 사태를 보아 밥솥이 어디가 고장 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개수대 왼쪽에 은색으로 반짝이는 동그란 철물이 눈에 들어왔다. ‘앗차! 저것을 밥솥에 안 끼웠구나. ’
뚜껑을 씻고 다시 끼운 다음 동그라미 부속을 끼워 돌렸어야 했는데...
수증기가 계속 나와서 어쩌지 못하며 남편을 계속해서 불렀으나, 남편은 캐릭터를 죽일 수도 없고 올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계속 애타게 부르며 압력밥솥이 터진다며 부엌 주변 접근을 차단하는 아내를 보며 애처로운 눈길을 한 번 보내고선 전원을 뽑으라고 간결하게 말했다.
나는 용감하게 밥솥 근처로 다가가 얼굴을 멀찍이 뒤로 빼고 밥솥 뒤편 벽에 붙어있는 전원 콘센트에서 코드를 뽑았다. 곧이어 수증기는 잦아들었고 나는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밥솥 뚜껑을 안 끼운 것은 여러 번이지만 은색의 동그라미 철물만을 안 끼운 것은 처음이다. 뚜껑이 제대로 안 끼워졌으면 밥솥이 말을 해줄 것이지, 말하는 밥 솥이 그것 하나 안 알려주고 취사를 시작하다니! 내가 밥솥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인가. 나의 정신을 탓할 일이지 웬 밥솥에 든 목소리 여자에게 투덜대는 것인지 원.
그리하여 정지된 밥은 그대로 방치되었다. 40분째 포트나이트의 세계에서 열심히 운동하고 있는 남편이 출동할 때까지 모두의 주방 출입을 금하였다.
그러나 나는 뭐든 먹을 것을 생산해 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식빵을 구우러 갔다.
식빵 테두리를 잘라 에어프라이어에 굽는다. 중간의 하얀 빵 부분은 프라이팬에 살짝 구워 중간에 치즈를 한 장 끼워 먹으면 바삭하고 맛나겠지? 프라이팬 예열을 하고 빵을 올렸다. ‘어머나 빵 부스러기가 바닥에 많이 떨어졌네. 청소기 한 번 돌릴까? ’ 하며 주방을 한 바퀴 휘~ 청소했다. 그러는 사이 어디선가 탄내가 올라왔다. 정말 한 바퀴만 휘 돌렸는데 그 짧은 시간을 참지 못하는 녀석들.
웃음밖에 안 나온다.
빵아 너는 또 왜 그러냐.
주방은 위험하다. 음식을 할 땐 바닥에 떨어진 빵부스러기 정도는 가볍게 무시하자. 조리를 할 때엔 아주 사소한 음식이라도 그 옆을 떠나지 말자.
하얀 식빵의 까맣게 탄 부분을 잘라내고 프라이팬은 포기했다. 에어프라이어에 시간과 온도를 정해놓고 돌렸다. 바삭하니 맛있었다. 기분 전환을 위해 설탕을 골고루 뿌려줬다.
누구도 빵을 태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개수대에 처참하게 잘려나간 까만 현장을 보기 전까지.
“여보야 밥을 빨리 도와줘. 왜 안 오는거야! “
“안 펴져 글라이더가. 난 원거리가 없어. 왜 산탄총만... “
“밥도 많이 했는데 어떡할거야. 내 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