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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실 영역 싸움

by 눈항아리 Mar 0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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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소파 위에 빨래가 없다. 메리 크리스마스라서 빨래가 하루 쉬라고 허락해 줬을까? 설마. 크리스마스이브에 마음이 늘어져 세탁을 쉬어서 그렇다.

빨래를 쉬었더니 소파가 비었다. 대신 세탁 바구니가 넘쳤다. 빨래에 부쩍 관심이 많아진 남편님, 아침 출근 전 주섬주섬 빨래를 세탁기에 넣는다. 뭔가를 도와주고 싶은 모양이다. 바로 실행할 모양이다.

그런데 그걸 본 나는 바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세탁기 뚜껑을 닫아 놓으면 생기는 습기에 대해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자니 남편이 그런다. 핸드폰으로 집에 오면 바로 꺼낼 수 있게 조작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무언가를 강렬하게 도와주고 싶은가 보다. 내가 모르는 기계적, 시스템적으로 빨래를 도와준다니 고맙기는 하다.

그러나 가 보지 않은 세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남편의 시도를 전면 차단해 버렸다. 돌아서고 바로 후회했다.


한 번 해보기나 할걸.

​​

나는 왜 남편의 도움을 단칼에 잘랐을까. 집안에서 주부의 관할 영역이 줄어드는 것을 경계하는 것일까? 나 혼자 은근한 영역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빨래라는 내 일, 세탁실이라는 내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듯한 남편을 밀어내는 듯한 느낌은 뭘까. 이것은 주방에서도 느껴보았던 익숙함이다. 주부가 너무 꽉 쥐고 있으니 가족 구성원 누구 하나 주도적으로 집안일에 참여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돌아서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뒤늦게 잔잔한 감동도 밀려온다.  “고마워요 여보. ”


‘세탁기 자유롭게 돌리세요. ’ 그건 또 안 될 것 같다. 당장 내 일정에 맞춰 안 돌아가면 밤사이 또 잠을 설치며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살림 꼭 쥐고 있으려고 하는 것 맞네, 맞아) ​예약 기능은 밤에 설정해서 새벽에 완료되는 것으로 한 번 이용해 봐야겠다.

아침의 세탁실은 빨래로 넘쳐나고 있었다. 하루 빨래 빨기를 쉬면 그렇다.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라 별 스트레스가 없다. 예전에는 쌓여있는 빨래 자체를 보기가 힘들었다. 빨래라는 묵직한 덩어리가 마음을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이제 빨래는 마음으로부터 가벼워졌다. 하루 열심히 세탁기를 돌리면 세탁 바구니의 바닥을 볼 수 있다는 걸 알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예상할 수 있다는 건 안정감을 준다.

불확실한 삶에 확실한 것 하나 획득하였다.

빨래를 하면 바구니가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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