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건조기가 열심히 돌아갑니다. 어제는 먼저 꼬마들과 먼저 잠이 들었습니다. 세탁기만 돌려놓고 자러 가면서 남편에게 뒷일을 부탁했습니다. 세탁기가 끝나면 건조기에 넣어달라고 말입니다. 남편은 가끔 부탁을 잊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젯밤에는 잊지 않고 빨래를 세탁기에서 건조기로 옮겨줬습니다. 고맙습니다.
남편의 살림 참여가 부쩍 늘었습니다. 관심도가 올라갔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지난번 남편이 생각해 낸 양말 빨래 바구니가 생겼습니다. 바구니는 아니고 안 쓰는 세숫대야를 놓고 양말을 보이는 대로 대야에 넣고 한꺼번에 돌립니다. 양말 짝은 늘 안 맞지만 양이 늘어나 양말 개수가 많아졌습니다. 풍족한 양말 생활을 즐기고 있습니다.
새로운 인물은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편은 평소에 타성에 젖어 있던 집안일에 새 바람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나의 일터이기만 했던 주방은 이제 남편의 주방이기도 합니다. 어지르기만 하고 뒷정리를 안 하는 게 눈에 거슬리곤 했는데 남편은 나름의 방법으로 개선 사항을 찾아내 이것저것 바꾸고 있습니다.
그릇이 부족하니 가게에 원정 나간 밥그릇을 챙겨 옵니다. 반찬통도 가끔 데리고 옵니다. (그릇 제자리에 가져다 놓기가 왜 전 힘들까요. 남편 덕에 요즘은 그릇이 풍족합니다) 볶음밥을 하려니 뒤집개가 필요했나 봅니다. 기다란 나무 뒤집개도 마트에서 주문했습니다. 프라이팬도 50퍼센트 세일이라며 사 왔습니다. 싱크대에는 최근 행주 걸이가 새로 생겼습니다. 간밤에는 키친타월 걸이를 달았네요.
이제는 우리의 주방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신혼 때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했던 일이었을까요? 그땐 남편은 일로 바쁘고 전 전업주부로 아이 키우기 바빠서 그런 생각을 못 하고 살았습니다. 당연히 전업주부인 나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부의 일과 남편의 일이 구분되어 있다고 마음속으로 못을 박아두고 살았습니다. 각자가 잘하는 일을 하고 살면 된다고 생각했지요. 그게 나는 살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너무 쥐고 안 놓으니 가족들이 들어올 구석이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방에는 복이의 흔적도 늘 남겨져 있습니다. 어제는 젤리스트로를 먹었네요. 가위와 젤리스트로 비닐 쪼가리가 보입니다. 환타 빈 병도 보입니다.
우리는 공간에 늘 자신의 흔적을 남깁니다. 우리의 공간에는 가족의 흔적이 남습니다. 이제는 그게 불편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싱크대 위에도 뭔가가 쌓여 있으면 화가 났던 예전의 나를 돌아봅니다. 말끔하게 다 정리된 싱크대에 가족들의 흔적이 쌓이면 열불이 났었지요. 이제는 하나 둘 그 불이 작아지고 있습니다.
집은 가족 모두의 공간입니다.
공간을 모두에게 내어주기를 나에게 간절히 바랍니다. 안방마님이 곳간 열쇠꾸러미를 쥐고 놓지 않는 그런 모양새, 그게 딱 저의 위치 같습니다.
마님,
열쇠 꾸러미를 하나씩 풀어놓으시지요.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습니다. 방학을 맞으며 공간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봅니다. 모두의 공간에서 복작복작 이 겨울, 잘 보내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