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력을 다해 살다 보니 시력이 무엇인지 잊고 살았다

by 눈항아리

복동이가 맨 얼굴로 왔다. 깜깜한 밤에 안경을 분질러 먹고 어찌어찌 안경을 얼굴에 달고서 가게까지는 잘 찾아왔다. 안경 없는 아들의 얼굴은 참 오랜만이다. 맨눈으로 옷가지 하나도 찾지 못하는 아들은 샤워하고 옷을 입기 전에 안경을 먼저 써야 할 정도로 눈이 나쁘다. 보조 안경은 어쨌냐고 하니 브이자로 꺾인 지가 오래라고 한다.


안경점으로 당장 전화를 했다. 깜깜한 밤, 모든 상점들이 문 닫을 시간이다. 단골 안경점도 막 문을 닫고 있다고 했다. 아침엔 언제 여느냐 물어보고 당장 내일 등교가 걱정이라 노심초사하며 이것저것 물어보니 셔터를 다시 올리고 있으니 빨리 오라고 한다. 바로 차를 몰아 안경점으로 갔다. 시력을 먼저 측정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새 안경이 완성되었다. 보조 안경까지 하나 더 맞추고 속전속결 완성이다.


안경이 완성되는 잠시의 짬을 이용해 아침에 운전할 때 눈이 부신데 선글라스를 하나 쓸까 싶어 이리저리 둘러보니 시력 체크를 해 보자고 한다. 시력... 그래 나에게도 시력이 있다. 시력이라는 것이 나에게도 있었다. 사력을 다해 살다 보니 시력이 무엇인지 잊고 살았다. 나도 안경 쓰는 사람이었다. 내 안경 어디 있더라? 선글라스도 어딘가 구석에 박혀 있다. 분명히.


큰 아이들이 어릴 때 옷이며 안경이며 그렇게 잡아끌었다. 아이들 안고 다닌다고 입고 다니던 면티는 죽죽 늘어났고, 안경은 하도 잡아채서 벗어던졌다. 영화 자막이 안 보일 정도로 눈이 나빴지만 괜찮았다. 영화를 잘 안 본다. 버스 번호는 눈을 찡그리고 봐야 했다. 괜찮았다. 아이들이 많아지면서 버스를 타고 다닐 일이 없어졌다. 그렇게 10년을 넘게 안경 없이 자유로운 눈으로 살았다.



불편을 느낀 건 운전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처음에는 표지판이 잘 안 보인다거나 간판을 잘 못 보는 사소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빛 번짐이 심해졌다. 빛에 관심을 가져서 빛이 더욱 빛나 보이는 줄 알았다. 어느 날부터는 출근길 햇빛이 그렇게 따가울 수 없었다. 눈을 찡그리고 다니면서 운전을 했다. 선글라스 하나 끼고 다닐 걸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하긴 그 바쁜 아침 시간에 선글라스 생각을 한번 못한 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차를 바꾸면서 앞 유리만은 선탠을 안 했다. 아침의 해는 눈부시지만 밤 운전을 대비해야 했다. 시골은 가로등도 없고 밤이 깜깜하다. 선탠을 해 더 어두워지면 혹시 길가로 지나가는 검은 사람을 못 볼까 봐서 그랬다. 아침에 조금 불편한 것이야 눈을 조금 찌푸리면 되는 것을...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선글라스 쓸 기회가 왔다.



안경사 님은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아들의 안경 만드는 동안 내 시력 측정까지 해 주신단다. 선글라스도 시력에 맞춰 끼면 좋을 것 같아 얼른 시력 검사를 위해 의자에 앉았다. 그러곤 선글라스 대신 안경을 맞췄다. 유브이 자외선 차단 등등의 기능이 들어간 안경알로 정했다. 아침 햇살뿐 아니라 밤운전 시에도 낮은 시력이 문제가 된다고 했다. 운전면서 건강검진 시 통과가 안 되는 지경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흐릿한 눈으로 대체 어떻게 다닌 것일까. 대충 다닌 것이지.



안경을 찾아왔다. 보석처럼 반짝이던 신호등이 또렷하게 초록불, 빨간불로 보였다. 안개 분수처럼 쏟아지던 가로등이 밋밋해졌다.


안경 부러뜨려먹은 아들 덕분에 13년 만에 나의 새 안경을 맞췄다.


핸드폰을 눈앞에 가져다 놓으면 글씨가 안 뵌다. 멀찍이 떨어뜨려놓으면 작은 글씨도 잘 보인다. 그런데 신기한 건 안경을 써도 똑같다. 하하. 안경점에서 하던 말이 생각났다. 나중에 돋보기 하라던 그 말. 요즘은 돋보기가 안경알 아래쪽에 붙어 있는 누진다초점렌즈를 한다고 한다. 하하. 나도 노안인가 보다. 어쩐지 지난해부터 작은 글씨가 안 보인다 했더니 돋보기가 필요한 눈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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