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것은 백합

백합은 하얘서 백합이 아니었다

by 눈항아리

백합은 다 흰색인 줄 알았다. 백합은 하얘서 백합이 아니었던가?


남편이 백합을 사 왔다. 꽃 심기에 관심을 보이며 깨알보다 작은 꽃씨를 뿌리는 아내를 위해 이번에는 다 큰 화분으로 사 왔다. 꽃봉오리가 어마무시하게 많이 달린 화분을 네 개나 사 왔다.


백합은 가게에도 있으니 집에 심을까? 시골집은 추우니 월동이 안 될 수도 있다. 그럼 가게에 심을까? 고민하다 가게 카운터에 앉아도 보이는 자리, 초록 풀이 무성한 자리 화단 한편을 마련해 백합을 심었다.


백합이니 당연히 여름에 하얀 꽃을 피울 줄 알았다. 그런데 꽃봉오리가 연두에서 노랑으로 변하더니 노랑꽃이 피었다.


“여보! 노랑꽃이 피었어! 저거 백합 맞아?”


나는 청순가련한 하얀 백합이 좋은데... 노랑 백합을 생각도 못해본 나는 어안 벙벙했다. 백합은 하얘서 백합이 아니었다.


“백합 종류가 여러 가지래. 자기가 노란색 좋아해서 일부러 노랑 백합으로 골라 왔지.”


아니 절대 안 좋은 건 아니고...

노랑이라 좀 놀라서 그런 건데...

백합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나리꽃 아닌가?


그런데 이리저리 찾아보니 ‘나리’는 백합의 순우리 말이란다. 나리가 백합이고 백합이 나리란다. 흔하게 보던 주황색 참나리는 주황색의 백합이었다.


백합의 백은 흰 백이 아니었다. 백합의 백은 일백 백이다. 종류가 여럿이라서 그렇다 하기도 하고, 구근을 이루는 비늘조각이 백 개만큼 많아서 그렇다고도 한다. 이름의 유래가 여럿 있지만 남편은 가을에 비늘조각을 양파 껍질처럼 벗겨 심으면 번식을 한다는 말에 또 혹했다. 심었던 백합을 뿌리째 뽑아 가을에는 그 알뿌리를 해체하고 있을 남편의 모습이 눈앞에 왔다 갔다 한다. 몇 년 후면 백합밭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하.



첫날 두 송이 피워낸 노랑 백합은 다음날 또 마구 꽃망울을 터뜨렸다. 한꺼번에 우후죽순 노랑 꽃잎을 연다. 연두 꽃봉오리를 뚱하게 부풀리고, 노랑으로 변하고, 여섯 장 노랑 꽃잎을 거대하게 펼친다. 나는 작은 꽃이 좋은데... 노랗고 커다란 꽃은 좀 부담스럽다. 하하. 꽃모종을 키우며 1주에서 2주를 기다려 작은 새싹이 올라왔다고 방방 뛰었는데 백합 화분은 사 온 지 삼사 일만에 꽃을 마구 피워대니 정신이 없었다. 기쁨이 주체를 못 하겠다. 노랑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골라왔다니 볼수록 대견한 꽃송이다. 낮은 울타리 너머 노랑꽃이 만개하니 옆집 할머니도 구둣방 아저씨도 한 번씩 꽃구경을 온다. 남편도 나도 때때로 꽃 마중을 나간다.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노란 백합 이야기부터 시작해 동네 어른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운다.


날도 더운데 노란 백합 혼자서 꽃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날은 30도가 넘어가는 날씨였다.


한여름의 흰 백합 볼 날도 기다린다. 뒷마당 앵두나무 옆에는 키다리 흰 백합 한 송이가 힘차게 자라고 있다. 초록 풀이 마구 올라오던 어느 봄날, 남편이 그냥 잡초인줄 알고 몇 뿌리 뽑아냈다고 한다. 남편은 잡풀을 힘들게 뽑았던 그날 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식물의 뿌리와 달랐던 둥근 알뿌리 때문이다. 그나마 딱 한 뿌리는 앵두나무 옆에 착 달라붙어 있어서 목숨을 건졌다. 다행이다. 하나라도 남아서.



올해는 비비추도 남편의 예초기 날을 잘 피했다. 내가 열심히 설교를 한 덕분에 지피 식물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남편도 이제 몇 가지 꽃을 안다. 초록 풀도 남편에게 귀한 꽃으로 대접받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나는 쑥쑥 자라는 쑥도 좋아한다. 남편은 모르는 풀은 잡초라고 생각한다. 모르는 풀이 다 잡초는 아니다. 그저 내 화단에서 가꾸지 않는 풀일 뿐이다.



다 안다고 단정하지 말자. 노란 것도 백합이냐며 따지듯 물었을 때 남편의 어이없는 표정이 떠오른다. 남편을 믿자. 그리고 색깔 보다 중한 것이 그의 마음이다.


상대의 의견을 수용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착각하지 말자. 우선은 받아들이자. 그리고 반박하고 싶다면 사실 조사를 철저히 하자. 하하.


배합에게 배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백리향과 돗나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