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직포 화분 속 고추 이야기 <고추 테리어>
조석으로 문안인사에 식사 챙겨 드리기,
잠자리가 불편하지 않은지 돌봐 드리기,
안색이 어떠한지 살펴 드리기,
날씨를 보아가며 바퀴 굴려 산책시켜 드리기.
이런, 부모님 봉양보다 더욱 지극한 지고.
그런 고추의 열매를 똑 땄으니 얼마나 귀할까.
뭘 해 먹을까, 미인 고추 존재감이 팍팍 드러나도록
맛이 있는 걸 해 먹어야 할 텐데.
아이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해야 할 텐데,
밭에서 난 재료와 함께 전을 부쳐먹자.
어울림이야말로 최고의 음식이지
둥근 호박, 감자, 대파, 고추를 준비하여
둥근 호박 채 썰고 감자를 채 썰고
대파 쫑쫑 썰고 고추도 쫑쫑 썰고
계란 탁 떨어뜨리고 밀가루 솔솔 뿌리고
소금 후루룩 뿌리고
전을 부치자.
아차, 물을 부어야지.
얼마나 부을까 생각도 없이
대중없이 콸콸 부었다.
감자 삶을 때처럼 자박자박하게 부으면 되는 거 아니었나?
전을 너무 오래전에 부쳐봐서...
눌어붙어 까만 전을 목전에 두고
첫 장이야 태워먹어도 프라이팬 다스리기라고 여기고
둘째 장부터 바삭하게 구워하지 하며
얇게 펴서 꾹꾹 눌러 바삭하게 구워지라고 기도했지만
질퍽질퍽 죽 같은 ‘호박감자고추전’아.
익어라 익어라 익은 것이 맞겠지?
뭉쳐져라 뭉쳐져라 강약 강약 강강 약으로 불 조절을 해보고
앞뒤 앞뒤 앞뒤로 뒤집어 봐도
모양만 헝클어지고 죽 같은 ‘호박감자고추전’은 변하지 않았다.
왜 불을 붙여 놨는데 변하지 않는지
나는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지만
한 볼 만들어놔서 부치기는 부쳐야 하고
재차 도전해 또 태워먹은 죽 같은 전.
나는 전에 소질이 없는가 보다.
요리 실력을 한탄해 보기도 하였다.
그나저나 한 솥 만들어둔 희멀건 반죽을 어찌할꼬 근심하며
냉장고에 처박아버린 죽 같은 반죽.
부친 반죽은 먹어야 하는데...
죽 같은 탄 전 세 장...
밀컹거리는 탄 전을 한 귀퉁이 잘라 입에 넣어보니
소금 간이 덜 되어 밍밍하기까지 하다.
조금이라도 만회해 보려고 맛있는 간장을 만들어보려고
간장 붓고 고춧가루 팍팍 뿌리고
들기름 참기름을 솔솔 뿌리고
깨소금을 톡톡 뿌리고 나서
간장 찍어 맛을 보니 간장 맛이다. 맛 좋다!
*밀컹거리다 : ‘미끈거리다’의 강원도 방언입니다.
죽 같은 전 세 장을 소담하게 담아 가
남은 반죽 처리를 고민해 보며
남편과 나란히 앉아 죽 전을 먹는데
여보 전이 이상해, 날씨가 너무 눅눅한가 봐.
애교로 무마해 보아도 변하는 건 없고
전의 식감에 유독 민감한 남편이 한 입 먹어보더니
반죽이 너무 질어서 그렇다고 하며
부침 가루를 엄청 때려 부으라고 처방하며
전 하나를 입에 넣는데
먹을만하다면서 자꾸 물을 너무 많이 넣어서 그렇다고 타박을 했다.
나는 별수 없이 듣기만 하고
간장 그릇을 그의 앞에 쓰윽 밀어주었다.
간장의 맛에 힘입어 우리는 죽 같은 전 세 장을 다 먹었고
저녁을 기약했다.
호박인지 감자인지 고추가 들어갔는지
전에 대체 뭐가 들어갔는지
모든 것의 존재는 잊혔다.
전은 그저 죽 같은 전일 뿐이었다.
저녁이 돌아와 부침가루를 사러 가야 했지만
귀찮아진 나는 다시 밀가루를 들이부었다.
소금을 솔솔 뿌렸다.
열심히 저어 질척거리는 감촉을 줄이고
물기가 거의 없는 반죽을 만들었는데
하얀 밀가루 반죽이 됐다.
임시 처방으로 호박 반 개를 더 썰어 다시 무쳤다.
물기가 안 떨어지는 된 반죽을
프라이팬에 조심히 올리고 살살 펴서 강불에 익히니
지글지글 날도 더운데 불까지 덥구나.
전의 높이가 예상보다 두둑하다.
하나 부치고 두 개 부치고 노릇하게 잘 익는구나.
멀쩡하게 익어가는 ‘호박감자고추전’이 대견해
전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프라이팬을 높이 들어
전 뒤집기 묘기를 선보이자,
복실이는 박수로 환호한다.
하하하. 이 맛에 요리를 하지.
1인 1 전 부쳐 저녁으로 먹고
남은 반죽을 모두 소진하였다.
어울림이고 뭐고 전은 부치지 말아야겠다.
지글지글 불도 너무 뜨겁다.
얼굴이 벌게져서 나가떨어졌다.
그래도 너무 맛있다고
복이는 밥을 슥슥 비벼 먹었다.
간장이 그렇게 맛이 있단다.
메인은 바삭하고 두툼한 호박 감자 고추이었건만...
다음날 남편이 물었다.
“고추 봤어? 고추 땄어? 없어졌어.”
‘당신 뱃속에 들었는데 몰랐어?’
“내가 따서 어제 전에 넣었지.”
미인 고추야 네 존재감이 어울림 속에 묻어갔다.
뱃속에 들었는데 아무도 그걸 몰랐다니.
너를 죽 같이 만들어 보내야 했다.
미안하다 고추야!
소리 없이 가버린 네가 눈에 밟혀
이렇게 글과 요리로 너의 자취를 남긴다.
타버린 전이었지만, 질척거리는 죽 같은 전이지만,
두꺼운 전 속의 너였고, 너의 존재를 찾을 수 없었지만
네가 그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나만은 기억하고 있단다.
내 어여쁜 고추야.
<고추테리어>는 부직포 화분에 키우는 고추 한 그루의 이야기입니다.
반려식물과 함께 호흡하는 일상 이야기입니다.
좁은 부직포 화분 속 작은 생명에게 삶을 배웁니다.
‘고추테리어’는 고추와 인테리어의 조합입니다. 제가 만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