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린재가 알을 낳았다

부직포 화분에 키우는 고추 한 그루 이야기 <고추테리어>

by 눈항아리
비상이다! 습격이다!


부직포 화분 속 고추 나무 한 그루 작은 숲 속에 낯선 생명체가 방문했다. 나는 새 생명 탄생의 신비를 보고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고춧잎 뒷면에 알알이 맺힌 갈색빛의 작은 알갱이. 노린재가 내 고추에 알을 낳았다. 노린재인 줄은 어떻게 알았을까. 노린재가 분명하다. 알을 낳고 산후 통증으로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 잿빛의 노린재가 보였다. 노린재는 알이 붙어 있는 고춧잎 바로 옆 줄기에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지나가다 보니 또 다른 고춧잎에도 알을 낳았다. 다산의 여왕이신가? 설마 계속 낳으려고? 설마 여러 마리? 악!


고추에게 다가가기 겁난다. 멀리서 보고 빙 둘러 지나갔다. 고추 주위를 한 바퀴 회전하며 멀찍이 서서 벌레 침입의 흔적을 찾았다. 한 그루의 고추이니 바로 고춧잎 두 장을 뜯어주면 좋을 것 같은데 맨손으로, 아니 장갑으로 무장을 한다고 해도 나는 벌레 알이 가득 붙은 잎을 건들지 못할 것 같다.


“여보 자기야! 노린재가 알을 낳았어!”

“......”남편은 대수롭지 않다.

“노린재가 있어!” 재차 말해본다.

“내가 볼게.”말만 하고 하루가 지났고 이틀이 지났다.

“여보 자기야, 노린재가 태어나지 않을까?”

“그렇게 빨리 안 태어나.”


과연 그럴까? 맞다. 똑똑한 남편이다. 알을 낳고 부화하기까지 10~14일 정도 걸린다고 하니 시간은 넉넉하다. 과연 그럴까? 그럼 엄마 노린재는? 다른 큰 노린재는 어떡하지. 고추 줄기 안쪽을 뒤집어 보면 좋겠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무장을 안 하면 나는 절대 만질 수도 건들 수도 없다. 완전무장을 해도 가까이 가기 싫다.


‘노린재가 내 고추를 다 먹는 거 아닐까? 여보 서둘러요. 좀.’


“고추의 줄기에 붙어 구침을 박아 즙액을 빨아먹어 생육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고추에서 가장 피해가 큰 탄저병의 포자를 전염시키는 해충으로서 산과 인접한 지역의 고추밭에 많이 발생한다고 한다.” <농촌진흥청> 고추밭 꽈리허리노린재 발생 피해 우려/ 2013-08-08


탄저병을 전염시킨다잖아요! 은행 삶은 물을 뿌리든가 자기의 고운 손으로 모두 잡아 주세요. 제발, 빨리, 네?


초록의 작은 숲 속, 생명 탄생을 축하해야 할 그 자리. 나는 작은 생명체를 침입자로 규정했다. 정작 당사자인 고추는 태연했다. 노린재들은 나의 태도에 아랑곳 않고 알을 낳았다. 한 마리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더위에 후줄근하게 힘을 빼고 늘어진 고춧잎 뒷면에 열심히 낳았다. 알을 낳아 놓은 고춧잎만 늘어지지 않고 생기가 있었다. 벌레를 잡아내든 방제를 해야 하는 남편 역시 별스럽지 않게 대꾸만 했다.


왜 나만 호들갑인가? 왜 나만 발을 동동거리는 건가. 벌레가 나타나서. 알을 깨고 나와 금방이라도 나의 문턱에 발을 들여놓을 것 같다. 고추가 걱정되는 것이 아니라 벌레가 나를 습격할까 봐서 그런 것이다. 그깟 벌레 알이 무서워서. 고추 생각하는 척은 무슨! 고추 걱정이 되면 내 손으로 바로 고춧잎을 따서 노린재 알을 짓이겨버리면 되었을 것을. 내 손은 고고한 손인 척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서 입만 나불거리고 발만 구르고 있는 것이다.


그럼 다시 말해보자.


‘여보 노린재가 무서워요. 빨리 잡아주세요. 고추에게 다가가기가 겁나요. ’


솔직하게 말하자. 걱정하는 척하지 말자. 한발 물러서지 말자. 내 손으로 무엇이든 하자.


지난해 뜨거웠던 어느 여름날 집 앞 텃밭에서 고추를 따다 고추나무줄기에 층층이 다닥다닥 오밀조밀 붙어있는 노린재를 보았다. 노린재가 고추 줄기에 아파트를 짓고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삶에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삶을 산다. 나는 나의 삶을 살면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


나는 손으로 무엇을 하는 대신에 입으로 열심히 재촉의 말을 했다.


“여보 그러니까 빨리 좀 잡아줘요. 벌레 약을 뿌려줘요. 어떻게 좀 해봐요. ”


남편은 바쁘다. 남편은 남편의 삶을 산다. 친구들과 놀러 갈 방을 예약하느라 실시간으로 예약 사이트에 접속하고 있다. 하루 온종일. ‘새로고침’의 신이 되려고 한다. 벌써 3일째다. 방 예약이 끝나면 약을 뿌려줄 것인가. 그전에 노린재가 알을 까고 나올 것인가. 그전에 내가 무장하고 나가 벌레와 싸울 것인가.


우리는 함께 산다. 그러나 개개인은 나름의 삶을 살아간다. 나는 벌레가 거슬린다. 남편은 놀러 갈 생각에 신났다. 고추는 더위에 쪼그라든 와중에 생명을 품었다. 여름의 태양 아래 제 한 몸 가누기 힘든데도 초록 잎 그늘 아래 작은 벌레의 안식처를 허락했다. 노린재는 살림을 차렸다. 알을 낳았다. 알 속의 아기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곧 태어나면 고추나무를 쪽쪽 빨아먹겠지? 고추야 네가 허락한 노린재이니 어떻게 좀 흔들어 떨어뜨려 보아라. 고추에게 그냥 맡겨놓아도 될까.


벌레의 방문에 우리는 각자의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 손을 놓고 있다는 점은 같다. 그래서 조바심이 난 나는 우회로를 이용한, 조금 더 강력한 유인책으로 방제 기사를 불러 보았다.

“여보 고추가 더위에 말라죽어가요. 물을 줘야 하지 않을까? 이따 물 주는 김에 노린재 알도 좀 봐봐요. ”


저 적갈색 노린재 알을 떼버려야 하는데 자꾸 보니 신기하다. 노린재 녀석 고춧잎 뒷면이 자연 그늘인 줄 어떻게 알았을까. 안 떨어지고 붙어있는 건 더 신기하다. 자꾸 보다 정들면 안 되는데 어쩌지, 방제 기사 괜히 불렀나.


<고추테리어>는 부직포 화분에 키우는 고추 한 그루의 이야기입니다.
반려식물과 함께 호흡하는 일상 이야기입니다.
좁은 부직포 화분 속 작은 생명에게 삶을 배웁니다.
‘고추테리어’는 고추와 인테리어의 조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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