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나무도 꿈을 꾼다

부직포 화분 속에서 자라는 고추 한 그루 이야기 <고추테리어>

by 눈항아리

노린재는 알을 낳았고 방제 기사 남편은 모른 채 했다. 기다리다 못한 나는, 노린재 새끼가 알을 깨고 나오기 전에 직접 손을 걷어붙였다. ​

가위 날이 30센티미터나 되는 커다란 정원용 가위를 들고나갔다. 고추에 가까이 가지 않고 멀찍이 서서, 노린재 알이 붙은 작은 잎새를 찾아 싹둑 잘랐다. 화분 바닥에 추락하는 초록잎. 알알이 붙은 작은 생명. 그렇다고 노린재 알이 바로 터지는 건 아니었다.

‘해가 뜨거운 날인데 말라죽을까? 뒤집어 줄까? 뒷일은 그저 자연에게 맡기자.’

그렇게 가위질 세 번으로 노린재 퇴치는 끝났다. 다음날, 화분에 물을 주자 시커먼 흙의 부유물이 고춧잎을 덮쳤다. 노린재 알은 흙으로 돌아갔다.



노린재는 사라졌고 날은 선선해졌다. 고추는 하나둘 꽃을 피우더니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10개나 따서 어머님 가져다 드렸다. 된장국에 몇 개 따서 넣고, 떡볶이에도, 볶음 요리에도 넣었다. 필요하면 바로 아이들에게 “고추 따와!”하고 심부름을 시킨다. 문 열고 서너 발자국 나가 초록빛 열매를 따는 걸, 아이들도 좋아하는 것 같다. ​

작은 걸 자꾸 따먹는다고 남편이 더 키우라고 했다. 그래도 살그머니 가서 제일 큰 것으로 따온다.

고추의 일상은 열매를 매다는 것 외에는 별다를 것이 없다. 인간의 무료한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움직임 없이 한 자리에서 작은 화분에 갇혀 고추는 무슨 생각을 할까.

​큰 비도 없었다. 목이 마르지 않을 정도로 물을 주니 가뭄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저 해가 쨍쨍하면 잎을 축 늘어뜨리고, 해가지면 생기가 돌고, 물을 먹으면 탱탱해졌다. 먹고, 마시고, 햇볕을 쬐고 그게 다가 아닐 수도 있다. 키가 자라면서 고추는 세상을 더 많이 볼 수 있게 되었다.

밤이 되면 어둠에 휩싸였다가 아침이 오면 햇살에 몸을 부르르 떨며 물기를 털어내고, 바람결에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소리, 차 지나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담장보다 더 키가 자랐지만 세상은 고추나무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도 고추나무도 보는 것이 더 생겼다. 담장을 지나 길 건너 높은 담장 안에 있는 감나무. 2층집만큼 키가 큰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때로 작은 감이 떨어지면 데굴데굴 구르고 사람들 발에 치어, 고추가 보는 쪽문 앞으로 굴러오기도 했다.

고추나무는 감나무처럼 커지고 싶은지도 모른다.

<고추테리어>는 부직포 화분에 키우는 고추 한 그루의 이야기입니다.
반려식물과 함께 호흡하는 일상 이야기입니다.
좁은 부직포 화분 속 작은 생명에게 삶을 배웁니다.
‘고추테리어’는 고추와 인테리어의 조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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