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도둑

부직포 화분에서 자라는 고추 한 그루 이야기 <고추테리어>

by 눈항아리

열린 담장, 쪽문으로 들어온 누군가

초록이 미인 고추를 따갔다.


지난해에도 다 따 가지고 가서

속이 쓰리고 열불이 났는데.

역시나 올해도 누군가 모조리 따갔다.

꼬부라져 못생긴 작은 고추 하나 빼고

다 따갔다.


지난해에는 도둑놈이라고 쓴소리를 해대면서,

나눠 먹은 셈 치자며 마음을 다독였는데,

올해도 역시나 누군가는 고추를 따갈 것을 알았고

마음의 방비도 해놓았는데...


수두룩하게 달렸던 고추 열매는 보이지 않고

화분 바닥에 고춧잎만 우수수 떨어져 있었다.

또다시 도둑맞은 현실을 마주하니

보지도 못한 도독 놈이 미워 죽겠다.

‘아이고, 내 고추!’


나는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는 도둑을

눈앞에 만들어 세워두고

욕을 퍼부었다.


나눔을 했다 마음을 다스리면 되지만

훔쳐간 놈은 다스릴 마음도 없으니 고추를 따갔을 테지.

그것이 너무나 애석하고 분통하다.


“고추 따간 도둑놈아!

얼마나 고추가 먹고 싶었으면

애중중지 내 고추를 다 따갔냐!

잘 먹고 잘 살아라! ”


아까운 내 고추.




도둑맞은 고추는

이제는 내 것이 아닌데

쏟아부은 마음이 아까워서

미련이 남는가 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분을 못 삭이고

이놈, 저놈, 나쁜 놈.

도둑놈 욕을 하고 있다.


벌레가 먹는 건 안 아까운데

왜 사람 먹는 게 아까운지.

안 따간 고추, 작은 고추, 꼬부라진 고추, 남겨진 고추, 위안을 주는 고추. 도둑놈도 싫어하는 고추
<고추테리어>는 부직포 화분에 키우는 고추 한 그루의 이야기입니다.
반려식물과 함께 호흡하는 일상 이야기입니다.
좁은 부직포 화분 속 작은 생명에게 삶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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