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sunday farmers

그 맛이 무슨 맛인지

수확의 기쁨

by 눈항아리

밭에 나간 농부 남편이 들어오지 않는다.

남편 오늘은 일요일이 아니야, 오늘은 토요일이잖아.

시골집 마당이 너무 넓어 밭에 나간 남편을 부르려면

뱃속 깊숙한 곳에서 용솟음치는 묵직한 괴력의 소리를 끄집어내야 한다.

여름 감기에 걸려버린 목이 쇠를 갈아대는 소리를 낼까 봐 외침은 넣어 두었다.

남편을 데리러 간다. 출동이다.

아침에 손수 수확한 자연 먹거리

나의 아침 출근 준비가 빠듯하지만 남편을 밭에서 먼저 구해와야 한다.

우리는 함께 일하는 자영업자 부부니까.

밭에 두고 나 먼저 출근하면

밭에 붙들려 있다 언제 출근할는지 기약할 수 없다.

자연을 사랑하고 밭을 사랑하고 수확물에 감격하는 날들을

남편은 최대한 즐기고 있다.


자연이라는 우리의 텃밭, 짧게 나갔다 오더라도 완전 무장은 필수다.

반바지 위에 긴바지 하나를 덧입는다.

긴 양말을 정강이까지 올려 신는다.

반팔 위에 부스럭거리는 땀복을 하나 덧입는다.

현관에 서서 창 넓은 모자를 뒤집어쓰고, 장갑도 꼈다.

완벽한데... 장화는 바깥 창고에 들러야 하는데... 그냥 출동한다.

남편은 밭가에서 옥수수의 껍질을 벗기고 있다.

밭에는 안 들어갈 테니, 옥수수 껍질 몇 개 벗기고 나올 테니, 이 정도면 되겠지.

여보 우리 출발 시간이 지났어요. 빨리 가자.

그러면서 옥수수 껍질을 몇 개 벗겼다.

옥수수는 자신이 깔 테니 그럼 터널에 가서 호박을 좀 따 오란다.

나는 장화도 안 신었는데.

호박은 저 멀리 터널 제일 끝에 있는데...


커다란 김장 비닐을 들고 가위를 하나 들고 터널로 간다.

풀을 피해 제초매트만 밟아가며 터널로 간다.

터널은 덩굴로 엉망이다.

오이가 구부러진 몸뚱이를 익히려고 배를 불리고 있다.

적당히 배부른 백다다기 하나, 청오이 하나를 따서 담았다.

방울토마토가 후드득 떨어져 검정 바닥을 벌겋게 수놓았다.

가지에 매달린 토마토 중 벌레 안 먹은 것을 골라 담았다.

톡 건드리니 후드득 떨어진다.

세워주지 않은 가지는 쇠파이프 하나를 옆에 두고 퍼드러져 있다.

간격을 벌리고 심는다고 싶었는데 가지와 가지가 만나 인사하고 있다.

척 늘어진 잎을 뒤적이며 검보라색 가지를 찾는다.

여기도 가지 저기도 가지.

가위를 들고 꼭지를 자른다.

참외는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다.

터널에 씌운 망을 타고 참외 줄기가 올라간다.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열매는 초록이다.

먼저 달린 참외는 바닥 근처에 아슬아슬 매달려있다.

말벌이 어디선가 나타났다.

3보 후퇴해 벌의 비행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벌은 날아갔고 나는 3보 전진했다.

바닥에 누워있는 노란 참외 몇 개를 발견해서 땄다.

미처 망을 타고 터널 위로 오르지 못한 참외 순이 바닥에 쫙 깔려 있다.

순을 피해 가며 살살 걷는다.

그 뒤로 둥근 호박 넝쿨이 쫙 깔려 있다.

호박 줄기는 일부 터널 위로 오르고 일부는 바닥으로 기어 다닌다.

따도 따도 또 생산되는 신기한 호박이다.

얼마나 많이 또 빨리 자라는지 상상초월이다.

오늘 보고 내일 보면 크기가 다르다.

이틀 기다려 따면 야구공만 한 호박이 럭비공이 되어버리고 만다.

개중에 많은 열매들이 잎 뒤에 숨어있다.

그건 호박 크기를 키워 씨앗을 만들려는 호박의 생존 본능인지도 모른다.

커지려는 호박들을 무참히 따야 한다.

가을이 되어 노란 호박이 되면 호박을 앞에 두고 식칼을 들고 칼춤을 추며 식식거려야 할지도 모른다.

보이는 대로 다 따라!

참외 넝쿨이 터널 중앙을 가로막고 그 뒤로 호박 넝쿨이 숲을 이루고 있다.

둥근 호박 뒤로는 단호박이 있다.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다.

터널을 빠져나와 터널 밖으로 돌아간다.

단호박은 그냥 바닥에서 기어 다닌다.

망을 해서 터널로 올리지 않은 우리의 선택이 탁월했다.

선택이 아니라 미처 손이 못 간 것이지만 어쨌든.

단호박 크기가 배구공만 하다.

그걸 하늘에 매달았다면 뚝뚝 떨어지는 호박을 보며 후회하고 참회의 시간을 보냈으리라.

하나만 크면 말을 않는다.

달린 단호박은 다 그렇다.

왜 그렇게 큰 걸까.

마트에 파는 단호박은 예쁘고 아담하던데.

종자가 다른가 보다.

잘 익었나 보려고, 겉으로 봐도 알 수 없지만, 슬쩍 건드려보았다.

꼭지가 똑 떨어진다.

아하! 딸 때가 되었나 보다.

하나를 봉지에 담았다.

그럼 하나 더 따볼까.

남편도 수박이 익었나 안 익었나 보려고 따서 갈라보던데, 가위로 꼭지를 잘랐다.

봉지는 많이 무겁다.

얇은 재활용 봉지가 아니니 괜찮다.

두툼한 김장 봉투다.

10분 만에 이 모든 농산물을 수확했다.

나는 수확의 여신인가 보다.


수확의 기쁨으로 가득 차 발걸음 가볍게 밭을 나선다.

김장 비닐에 구멍이 뚫려있다.

방울토마토가 바닥에 방울방울 떨어진다.

옥수수 까는 남편이라는 관문을 통과하려고 한다.

아직도 옥수수를 까고 있는 남편, 우리 언제 출근 하냐고욧!

그 와중에 남편은 방울토마토를 아래에 넣으면 터진다고 말한다.

아뿔싸! 무거운 걸 아래에 넣어야 하는데 따는 족족 순서대로 봉지에 넣다 보니 토마토와 오이, 가지가 맨 아래쪽에서 찌그러지고 있었다.

토마토 떨어진 걸 본 건 아니겠지?

단호박은 왜 따왔냐고 그런다.

꼭지가 갈색으로 변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톡 건드렸을 뿐인데 꼭지가 톡 떨어져서 가져왔지.

하나는 말하고 하나는 말을 아꼈다.


얼른 차 트렁크를 열어 봉지를 내려놓았다.

배구공만 한 단호박부터 옆으로 꺼내 놓았다.

호박도 둘 내리고 방울토마토가 괜찮은지 터졌는지 확인할 새도 없이 집으로 들어갔다.

10분 만에 땀범벅이 됐다.

출근차에 농산물을 싣고 간다.

남편이 매일 따다 주는 것을 받았을 때는 분명 짐덩어리 같았는데,

짧은 시간이지만 더위와 싸우고 풀숲을 헤치며 말벌을 피해 가며

내가 손수 수확한 먹거리는 뭔가 특별하다.

모기에게 뜯기지 않은 것을 감사하고, 벌에게 밉보이지 않은 것을 감사했다.

세척을 한 후 채반에 올려놓으니 한 바구니.

남편은 아침에 딴 옥수수를 어머님 댁에 나르고

내가 딴 참외랑 호박이랑 가지랑 토마토도 어머님 댁에 가져다 드렸다.

나는 호박이랑, 단호박이랑, 토마토랑, 삶은 옥수수를 들고 언니한테 날랐다.

남편이 따온 옥수수를 나를 땐 별스럽지 않았는데

내가 딴 먹거리를 안고 가는데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호박 하나에, 참외 하나에, 토마토 하나에.

그게 뭐라고.


남편은 요즘 매일 아침 옥수수를 딴다.

점심만 밥으로 먹고 아침, 저녁은 옥수수로 먹는다.

옥수수 삶는 찜솥 옆에 앉아 연신 옥수수를 뜯어먹는다.

잘 삶아졌는지 확인하느라 하나 먹고 또 먹고 한단다.

남편이 옥수수를 그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다.

입 꼬리 옆에 누런 옥수수 씨눈은 왜 그리도 달고 나오는 건지 원.

그런데 내가 수확을 해 보니 그 느낌을 알겠다.

그 맛이 무슨 맛인지.

그래도 나는 옥수수 씨눈을 얼굴에 붙이고 다니지는 않는다 뭐.


자연이 주는 고마운 맛.

그 맛을 알려면 무장을 하고 나가야 한다.

으으~~

내일은 일요일, 벌건 고추가 무섭게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남편은 빨리 따버린 단호박이 못내 걸리는가 보다.

단호박은 딴 후 보름 정도 숙성을 해야 맛있다고 한다.

단호박을 딴 오늘 날짜를 꼭 기억하라며 성화다.

여기, 브런치에 다 적어놨다고욧!

그런데 저것은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 알 수 없는데 대체 어쩐다.

보름 후에 단호박이 멀쩡하려나.

언니에게 가져다준 단호박은 괜찮을까? 먼저 잘라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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