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sunday farmers

2025 첫물 고추를 따며

by 눈항아리

나 홀로 새벽의 밭으로 간다. 몇 년 고추를 따면서 배운 부지런함을 처음 실행한다. 해가 뜨기 전, 조금이라도 시원할 때 고추를 따야 한다. 매번 고추 따기 싫어 얼마나 늑장을 부렸던가. 일을 늦춰봤자 내가 할 일이 줄어들지 않는다. 더위에 일이 힘들어질 뿐이다. 남편의 도움을 바랄 수 없다. 남편은 진득하니 앉아 고추를 못 딴다. 다른 건 다 잘하는 양반이 왜 고추를 못 딸까. 그는 입으로 빨간 고추만을 딸뿐이다.


해뜨기 전에 나가니 새벽바람이 시원하다. 입추가 되자 뜨뜻미지근하던 바람에 청량함이 담겼다. 귀뚜라미가 그걸 제일 빨리 알아챘다. 들판에는 가을의 풀벌레 소리와 매미 소리가 섞여 들린다. ‘골골 골골‘ 거리는 새소리까지 숲속의 생명체들이 살만하다고 떼창을 한다. 곧 이글거리는 태양이 떠올라 무대 위의 조명을 더욱 밝혀준다. 여름 햇살이 정수리 위로 쏟아졌다. 소나무 숲 위로 떠오르는 번쩍거리는 태양의 위용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나에게 태양은 절대 조명 따위가 아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쪼그려 앉았다.


초록 잎 사이에 퍼질러 앉아 붉게 익어가는 고추를 딴다. 두 손으로 곱게 따다 가위로 툭툭 자른다. 첫 번째 고추나무의 튼실한 가지 하나가 팔꿈치에 걸려 우지끈 부러졌다. 이런! 실수다! 고추 따는 일은 단순 반복 작업이다. 그러나 줄기를 잘라먹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손에 있는 모든 근육을 이용하고 나의 사고력과 인내력, 운동신경을 총동원한다. 운동신경이 미미하니 쪼그리의자에 편하게 앉아있을 수만은 없다. 무릎을 꿇고 앉아 아래에서 위로 고추나무를 쳐다보며 손목을 놀려보고, 서서 고추 줄기를 한쪽으로 젖히고 살피기도 한다. 이런 대단한 공을 들여 줄기와 초록 고추와 덜 익은 고추를 피해 빨갛게 익은 고추 꼭지 하나를 따낸다. 나의 정성이 갸륵하다.


새빨갛게 잘 익은, 쭉쭉 뻗은 고추가 있는가 하면 동그랗게 뻥 구멍이 뚫려 있기도 하다. 등딱지를 등에 짊어지고 가는 잿빛의 노린재가 범인일까? 머리가 그렇게 크지 않은데, 다른 놈 짓인가? 잿빛만 보다 등에 연두 색 무늬가 있는 노린재는 예뻐 보이기도 한다. 내 고추를 먹지만 생태계 안에서는 벌레도 중요한 일을 한 테다. 그저 옆으로 멀리멀리 보내버렸다. 순간 노린재가 방황한다. 길을 잃고 방향을 잃은 곤충은 여기가 어딘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쇠똥구리가 길을 잃으면 방향을 찾기 위해 굴리던 쇠똥 구슬에 올라가 별을 관찰한다던데, 노린재는 과연 제 집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노린재의 집은 내가 다 털었는데 과연 노린재는 새 집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인가. 헤어진 가족과는 만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노린재가 가족을 알아보기는 하는 걸까. 쫓아낸 주제에 벌레의 안부를 다 걱정한다. 벌레를 무서워하고 기겁하는 나는 서서히 바뀌고 있다. 오늘은 머리에도 수건을 하나 더 둘러썼고 목에도 하나 둘러썼다. 그래서 더 마음이 너그러워진 것인지도 모른다. 벌들이 날아도 앵앵거리는 모기가 날아도 한결 무심해졌다.


새와 벌레, 풀과 인간이 모두 자연에 속한 존재라는 걸 이제는 나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내 집은 벽돌집, 그들의 집은 숲과 내 밭이란 걸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이 마을에서 어울려 산다. 조화롭게 때로는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꺅! 머리통으로 거미줄을 박았다. 부러진 고추 가지를 하나 들고 다니며 거미줄을 훠이훠이 걷어낸다. 부러진 가지 하나도 다 쓸모가 다 있다.


고추밭은 다양한 생명으로 가득하다. 고랑까지 제초 매트를 빼곡히 깔았지만 바랭이 풀은 흙에 거대한 뿌리를 내렸다. 세상이라는 출구 밖으로 솟아나 줄기를 사방으로 뻗어가는 바랭이는 흙도 없는 곳에서 줄기를 키우고 작은 뿌리를 내린다. 끈덕진 바랭이의 거대한 뿌리를 자르고 줄기와 잔뿌리를 걷어냈다. 풀 그늘을 안식처 삼아 살고 있던 거미와 개미, 등껍질이 딱딱한 벌레들이 갈팡질팡한다. 종류도 많다. 집이라는 풀을 다 뜯어버려 놀란 생명들. 화가 났나? 전투 개미인가? 개미가 열을 내며 상체를 들고 다닌다. 내 장화로 기어오를 것 같아 다리를 쿵쿵 거리며 털었다. 등껍질 딱딱한 곤충은 제초 매트 아래 그늘을 찾아 도망간다. 거뭇한 아기 노린재는 뒤집혔다가 몸을 다시 뒤집고 도망간다. 수적 우위를 점한 다양한 녀석들이 무섭다. 나는 하나, 그들은 여럿이다. 왜 그들을 묶고 나만 빼놓은 걸까. 슬그머니 나도 고추밭이라는 그들의 울타리 안에 슬쩍 섞여들었다.


다양성은 좋은 신호다. 우리 밭이 건강하다는 신호다. 우리가 먹을 건강한 고추는 바구니에 담는다. 벌레가 먹은 고추는 바닥에 어지러이 떨어져 있다. 벌레가 먹을 고추와 내가 먹을 푸릇한 고추가 아직 나무에 많이 달려있다. 햇볕과 바람과 비와 땅에 사는 모든 곤충과 새들의 노래, 벌의 비행, 그리고 농부의 노력, 모두의 힘을 모아 고추를 키워냈다. 나도 먹고 너도 먹고 다 나눠먹고 그래도 남은 것이 많다.


모두의 힘으로 키워냈지만 내가 먹을 고추는 내가 딴다. 고추에 구멍을 뚫은 녀석도 구시렁거리며 파고 들어갔을까? ‘인생 참 맵다’ 그러면서 고추 열매 속으로 기어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고추 따는 아낙은 혼자 투덜투덜한다. 장갑이 축축하게 젖는다. 손이 탱탱 불어 터진다. 아침 이슬이 진주같이 곱다고 누가 그랬던가. 보기에만 좋다. 숲이 밤새 품은 냉기와 여름을 보내기 싫은 태양의 겨루기에 대기가 눈물을 짜낸다. 손에 다 달라붙어 장갑이 안 벗겨진다. 칙칙하다.


해가 떠오르고 한참도 안 되었는데 이슬은 어디로 도망갔는지 꽁무니도 안 보인다. 도망에 나보다 재능이 있는 녀석이라니. 배우고 싶다. 태양이 성가시게 구니 고추 따는 손이 느려진다. 불그스름하게 거뭇한 고추가 다 빨개 보인다. 서둘러 고추를 마저 따고 마지막 농사 바구니는 밭에 버리고 집으로 쌩! 토꼈다. 토끼다의 어원은 토낀 토끼에게서 온 것이 아닐까. 하하. 토끼보다 빠르게 이슬처럼 빠르게 달렸다.


“여보! 나는 들어가요! 더는 못해! 빨리 들어와! 고추 바구니 하나 들고 와요! ”


집에 들어와 거실 바닥에 대 자로 뻗었다. 방바닥은 새벽의 서늘함을 품고 있었다. 뭐니뭐니해도 내 집이 제일이다. 곤충들에게 미안함을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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