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비루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음식을 향한 탐욕이 사람을 비루하게 만든다. 문제는 음식의 질이나 양이 아니고 감각적인 맛에 강렬한 애착을 느끼는 데 있다.
316쪽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민음사
종일 비루했다. 아침에 이 문장을 보고 음식을 향한 내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불어나는 내 배를 보았다. 비루했다.
배는 원했다. 더 불어나기를, 기름지기를, 빵빵하게 부풀기를, 지방층을 쌓기를. 배가 빵빵해지도록 배 터지게 먹었다. 먹고 후회했다. 왜 뒤늦은 후회를 하는 걸까?
입은 원했다. 씹을 수 있기를, 달콤함을 맛볼 수 있기를, 한 입 가득 베어 물기를. 먹고 먹고 먹었다. 입안 중앙을 한가득 차지하고 있는 혀가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혀끝에 닿은 상큼함은 금세 사라졌다. 식감을 느끼고 싶은 이가 문제인지도 모른다. 치아 사이에서 바삭바삭 부서지는 과자의 고소 달달함.
짜장면 면발을 입으로 후루룩 잡아당기고 단무지를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는다. 조화로운 단맛과 짠맛의 대행진. 백향과의 단물은 쏙 빼먹고 까만 씨앗은 오도독오도독 씹어 먹는다. 푸릇한 사과를 아삭아삭, 사각사각 씹어 먹는다. 단물이 주르르 입안을 가득 채운다. 목구멍으로 바로 흘러드는 단물, 이미 단물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음식물을 씹으면 바로 입안에서 사라지는 시스템, 맛을 잠시 잠깐만 느낄 수 있는 시스템은 음식을 계속 원하도록 만든다. 입에 배부름이라는 기능이 달려있다면, 음식이 입안에 오랫동안 머물며 맛을 계속 느낄 수 있다면 나는 절대로 음식을 더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계속 먹는 습관은 인간이라는 몸의 시스템적인 문제인지도 모른다. 먹는 욕구를 참는 것은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단식은 고행, 수행의 한 방법이지 않은가. 그래, 나는 수행자가 아니니까 괜찮다. 배를 보고 그런 말을 하라고 이 사람아.
수도자가 아니라도 어른이 되면 음식에 대한 욕구를 조금은 조절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엄마 사탕 먹고 싶어요.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요. 과자 먹고 싶어요. 치킨, 햄버거 먹고 싶어요.” 나는 어린이가 아닌데 똑같이 원한다.
더불어 뇌는 원했다. 각성할 무엇인가를, 머리를 핑핑 돌릴만한 강력한 에너지원을. 커피를 연거푸 마셨다. 단 음료를 마셨다. 빨대로 쪽쪽 빨아먹었다. 정신이 확 깨도록 시원한 얼음 물을 들이켰다. 얼음을 와그작 씹어 먹었다. 어른이 되면 어릴적에 못 먹던 먹거리를 더욱 다양하게 양껏 알아서 먹을 수 있는 권한이 생긴다.
손은 원했다. 최소의 동작으로 움직이기를. 손가락에 붙는 것이 영 성가신 것이 아니다. 컵에 과자를 담아 입안에 털어 넣었다. 한 번에 들이 부었다.
음식을 향한 탐욕.
식탐이 심한 나는 늘 먹을 것의 유혹에 굴복하고 만다. 비루하다. 먹고 나서도 또 원한다. 그런 내 속 마음은 안 보인다. 그러니 괜찮다고 안심하면 안 된다. 배가 그것을 증명해 준다. 몸매가 비루하다. 뱃살은 안 빠진다고 했다. 퇴근길에 큰아이가 그랬다. 살을 빼기도 힘들고 빼도 뱃가죽이 늘어진다고 했다. 잦은 출산으로 배가 늘어나서 그렇다고 항변했다. 3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몸무게가 늘었다가 다 안 빠져서 그렇다고 변명해 보았다. 아이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는 내가 비루했다. 갓난아기 신생아의 몸무게는 고작 3.4킬로그램이었다.
나는 살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배가 원한다. 계속 채워달라고 한다. 나는 이가 아프다. 가끔만 씹고 싶다. 그런데 치아가 원한다. 식감이 좋은 음식을 발견하면 새로운 맛을 찾은 듯 기뻐한다. 요즘은 버섯의 식감이 좋다나? 나는 단맛을 신맛도 싫어한다. 그런데 혀는 달달하고 상큼한 것을 계속 달라고 한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다.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먹어댄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저 내 안에 여러 명의 내가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감각적인 맛을 조심하자.
욕망 속에서 내 몸매가 길을 잃을 수 있다.
아직 희망은 있다.
내 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