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스러운 미소를 가진 그녀, 라니는 휴대폰으로 페북에 올려놓은 자신의 말과 개의 사진을 내게 보여주며 자랑을 했다. 아내의 15일간의 한국 여행을 서포트하느라 미국에서 어린 남매를 돌보고 있다는 다정한 남편과의 결혼사진, 가족사진도 보여주었다. 엄마를 찾아보고 싶다고 한국으로 여행 간 아내. 그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느라 아이들과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덩치 큰 그녀의 남편은 사진으로만 얼핏 봐도 사람 좋은 인상을 주었다. 이 여자는 사랑받으며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기간 내내 페북에 사진과 영상을 올려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아이들과 잘 지내고 있는 남편에게 고맙다고 댓글을 달고나서 아이들의 사진을 내게 보여주던 그녀가 말했다.
"아이들을 낳아 길러보니 친엄마가 보고 싶어 졌어요. 아이들이 자랄수록 엄마도 내가 보고 싶진 않았을까. 엄마는 건강하게 살아계실까. 늘 궁금해요. 특히 제 생일이 되면 더욱 엄마가 보고 싶어요."
갓난아기 때 미국으로 입양된 그녀는 동방사회복지회와 아동권리보장원에 친부모 찾기를 신청해놓았다고 했다.
라니와 내가 만났던 건 작년 추석 다음 날이었다. 배냇 추석 파티에서 만난 아주 까만 머리에 이쁘게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작고 가녀린 그녀. 그녀는 한국에 오니 낯선 곳인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편안하다고 말했다. 다 비슷한 외모라 누구도 자신을 특별히 쳐다보지 않고 그저 평범한 한국인들 중 한 사람으로만 보인다는 사실에 한국의 공항에 도착하면서부터 편안함을 느꼈다고 했다. 다만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혹시 저 사람이 내 엄마는 아닐까 저 사람이 내 아빠는 아닐까 두리번거리느라 조금 바빴다고 했다.
2019 배냇 추석파티
그녀가 자신의 입양 관련 서류를 보여주었다.
1987년 당시 미혼이었던 그녀의 엄마가 울산에서 홀로 아기를 낳고 고민 끝에 아기를 위해 입양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게 된 정황이나 엄마의 가족사항이 비교적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 서류였다. 누군가 힘써 찾고자 하면 금방 찾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엄마가 어린 나이에 저를 낳았기에 키울 수가 없었던 상황을 이해해요.원망하지 않아요. 하지만 엄마를 꼭 만나보고 싶어요. 가능하다면 계속 연락도 하고 싶고요.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엄마를 꼭 찾아서 만나보고 돌아가고 싶어요."
비교적 자세한 서류, 그리고 먼바다를 건너 엄마를 찾아온 해외입양인의 간절한 바람을 읽은 아동권리보장원 직원의 노력 덕분에 일은 빨리 진척되었다.
한국에서의 일정이 5일 정도 남은 시점에 그녀는 아동권리 보장원으로부터 엄마가 계신 곳을 찾았고 우편으로 연락을 시도해보겠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물론 현재까지 해외입양인인 그녀에게 엄마의 주소나 연락처는 공개되지 않는다. 다만 기관에서 우편으로 연락을 취해볼 뿐이다.
그녀의 엄마에게 약 32년 전 당신이 낳았던 딸이 엄마를 찾고 있다는 기관의 편지가 도착했다. 라니가 정성껏 쓴 편지와 사진들이 함께 동봉되었다.
라니는 우편배달부가 세 번의 방문 끝에 ○○○ 본인에게 우편물이 전달되었다는 배송 상황을 전달받았다. 엄마에게 자신이 엄마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다. 엄마만 빨리 연락을 해 온다면 어떻게든 만나보고 돌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기뻐했고 나도 그녀의 상봉을 기대했다.
그녀는 엄마의 연락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나 연락은 오지 않았다.
한국 여행 일정은 끝이 났고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가 가족들과의 일상으로 복귀했다. 한국에서 관광하며 즐거웠던 순간들이 그녀의 페이스북을 풍성하게 채우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 미국인으로서의 삶. 두 아이의 엄마로서의 일상이 가득했다. 종종 그녀가 키운다던 동물들의 재미있는 사진도 올라오곤 했다.
그러던 11월 어느 날 그녀의 생일.
그녀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짧게나마 그녀를 돌봐 주시던 위탁모와 함께 찍은 아기 사진도 함께.
'Dear Omma.
엄마. 보고 싶어요. 저는 생일이 되면 특히 엄마 생각이 많이 나고 조금 우울해져요. 그리고 궁금해요. 엄마도 제 생일에는 제 생각을 하실까요?'
나는 일련의 상황들을 그녀의 입장에서 지켜보면서 안타까웠다. 저리도 엄마를 그리워하는데 답이라도 좀 해주지 너무하네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문득 답이 없는 그녀의 어머니가 궁금해졌다. 나는 혼자 이런저런 상황을 상상해본다.
라니가 엄마를 닮은 거라면 그녀의 엄마도 아기자기한 외모에 시원한 미소를 가진 밝은 사람이겠지... 1987년에 열아홉 혹은 스무 살의 나이였다면 지금 겨우 오십 대 초반이겠구나. 오십 대 초반이라면... 평범한 가정을 새로이 꾸리고 자식을 낳았다면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자녀들이 있을 수도 있겠네? 그녀에게 도착한 편지는 평온한 일상을 흔들어버리는 시한폭탄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아이구. 평생 가슴에 비밀로 묻고 살았던 존재가 갑자기 '펑!' 하고 튀어나온 것 같겠구나... 아... 그래... 잊고 살던 과거의 자신 그리고 자식과 조우하는 일은 상황에 따라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과거 대한민국에서 미혼모로 산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은 말할 필요도 없고 온갖 사회의 차가운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많은 고민 끝에 자신뿐 아니라 아이를 위해 해외입양을 의뢰했을 것이다. 해외입양이 산업화되어 있던 사회구조 속에서 누구도 아기의 양육을 포기한 그녀만의 잘못이라고 손가락질할 수는 없다.
(과거뿐 아니라 현재에도 대한민국의 비혼모, 비혼부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들에 직면한다. 물론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신의 아이를 책임지고 지켜내는 비혼부모들도 있다. 육아의 고단함은 물론 삐뚤어진 사회제도와 사회적 인식의 피로감과도 싸워왔을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라니가 미국으로 보내진 1988년 4월이면 대한민국은 바로 88서울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던 경제적 도약기였다. 눈부신 경제발전 속도 뒤에 있는 그림자와 같은 해외입양의 역사. 그동안 대한민국은 경제성장의 기치아래 조금 비겁했다. 양육이 힘든 상황의 아이들을 우리 사회가 책임지지 못하고 해외 기관의 도움을 받아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아동복지를 실현했다. 그것은 아이들을 원가정에서 양육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이 아니었다. 고아가 아닌 아이들을 고아 호적을 만들어 서류상 고아로 둔갑시켜 해외입양을 쉽게 도왔다. 라니 역시 고아 호적을 가지고 있었다. 고아임을 증명하는 구청에서 발행한 창설 호적. 해외입양을 위해 부모가 없는 아이라는 증명서. 해외입양 절차 또한 입양부모가 직접 오지 않아도 비행기로 단체 이송하는 방법으로 간소화하고 산업화시켰다. 전세기를 동원해 아기를 이송하기도 하고 유학 가는 학생들이 이 아기들을 함께 데리고 가는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경험 얘기들도 많다. 덕분에 '코리아=고아 수출국'이란 별명이 생겨버렸다. 정부가 애쓰지 않아도 기관에 맡겨버리고 한쪽 눈만 감으면 되는 가장 쉽고 간단하며 경제적으로도 이득을 볼 수 있는 방법으로 해결했던 과거의 아동복지.
나라가 가난해서 그랬겠지. 잘 살아보라고 그랬겠지.라고 자꾸자꾸 되짚어 생각해본다. 관계자들도 계속 그렇게 생각하며 수십 년을 이어왔겠지.
그리고 빛나는 2020년 오늘의 대한민국.
여전히 헤이그 아동 권리 협약에 비준조차 받지 못한 나라 대한민국.
이제 우리는 가난해서 해외입양을 보내는 나라가 아니다.
일년이 지나고 또 다시 추석이다. 이번엔 코로나로 부모님을 보러가지 말라고 권장하는 추석이 되었다. 추석이 다시 돌아오니 내년에 다시 돌아오겠다며 떠난 라니가 생각나서 이렇게 글을 써본다.
여전히 연락을 기다리는 라니와 여전히 연락이 없는 라니의 엄마.그들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Dear Omma, I hope you are well and healthy. I came to Korea in September to see if I could find you. While I was there I traveled to Seoul, Daegu, Busan and Jeju island. I almost went to Ulsan but I wasnt sure if you were there during Chuseok. I stayed a total of 15 days in Korea and instantly fell in love with our country. A part of me felt like I was home in such an unfamiliar place.
I truly hope that my search isnt causing you pain or anger and I pray this isnt conflicting with your present life. I was very sad leaving Korea without finding you. But I hope there will be another chance.
If there is a chance for us to communicate I would be extremely grateful. I will put my email address and kakaotalk ID in at the end of this letter.
Omma, I know this is a delicate situation, and again I wish you no pain. It would be wonderful to hear from you, at least to tell me if we can ever meet or talk. I'm planning on visiting Korea next fall. Omma, I know this is a huge thing to process. Take the time you need, I can wait.
My birthday is this month and I always wonder if you think about me or that 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