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허줄하고 속이 허퉁하면 그 집이 떠오르곤 했다. 그 장소와 공기, 지나다니는 사람들, 냄새까지. 큰 솥에 돼지부속을 한 가득 끓여내 사람들을 부르던 이모가 생각난다. 광주집이라고 불렸던 순댓국집은 낙원상가에 면하고 있었다.
운이 좋아 서울 사대문에 끝자락에 붙어 있는 학교에 다녔다. 등교는 지하철로 하더라도 하교는 한참을 걸은 뒤 지하철을 타곤 했다. 대학로를 거쳐 창경궁 뒷길, 안국동 광화문까지는 내 도보 하굣길이었고 그 호젓한 길을 걸으며 장래 나는 어떤 사람이 돼있을지를 생각했다. 성마르고 성급하던 내 학부 시절이었던 터라 나는 늘 배가 고팠고, 술이 고팠다.
그 집을 발견하게 된 날이 언제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어떤 모임 뒷풀이 자리, 헤어지기 아쉬워 사람들을 끌고 인사동부터 낙원상가까지 걸었다. 그 심야에 불이 켜진 몇 곳이 있었다. 솥은 아직 우리의 정염처럼 쩔쩔 끓고 있었다.
한 솥 가득 끓인 국물에 갖은 돼지 부속을 넣은 순댓국 한 뚝배기가 3천 원이라는 사실은 혁명 같았다. 시장경제가 엄연히 작동하는 서울 복판이었다. 아무리 인근의 우뚝한 상가 이름이 낙원이라고 하더라도 순댓국의 가격은 전복적이라는 느낌이었다.
맛은 또 어떻고. 가격에 비례해 맛이 헐하다는 편견은 버려야 했다. 국물은 우묵하고 고기는 씹기 좋았으며 토렴한 밥 역시 구수했다. 그 자리에서 30여 년 동안 장사를 했다는 이모는 맛에 이르는 길을 아는 이 세계의 몇 안 되는 사람 같았다. 아들은 H건설에 다닌다고 늘 자랑하던 이모에게 그런데 왜 장사를 계속하느냐고 물었다.
“아들은 아들이고 나는 나다. 왜 그런 걸 물어.”
저 남녘 K시의 유서 깊은 S여고 출신의 꼬장꼬장한 답이었다. 그 꼬장꼬장한 이가 담그는 깍두기 맛은 또 어땠고. 운이 좋은 날이면 막 김장한 깍두기를 맛볼 수가 있었다. 그런 날이 늘 있는 건 아니어서, 어느 날은 김장날에 맞춰보고자 몇 주를 매일이다시피 간 적도 있었다.
어느 날은 정치 갈등의 복판이었다. 이 후보, 저 후보, 저 의원, 그 대통령을 두고 칭찬하는 여론과 성토하는 여론이 한 자리에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이모 역시 정치에는 분명한 사람이라,
“저 이는 별로야. 그 이는 좀 해.”
라며 말참례를 두었다. 이모의 다정한 말 속에서 정치에 대한 혐오보단 연민이 자랐다. 이모는 그렇게 말 한 마디를 던지더니 다시 머릿고기를 썰러 돌아가는 것이었다. ‘들어와요, 맛있어.’ 행인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서. 후텁한 여름에도 맵싹한 겨울에도 말이다.
깍두기의 맛이 별미일리는 어렵다. 다만, 익숙하고 든든한 맛이 배어있는 것이다. 무는 아삭했고 국물은 달큰했다. 남도 출신이지만 별 젓갈을 쓰지 않은 맛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맛을 낼 수 있었는지, 막걸리에 깍두기 하나를 씹으며 어느 날은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막걸리도 싸기만 했다. 소주도 저렴했고, 맥주 하나만 비쌌다. 시세보다 1천원에서 1천 500원까지 저렴한 건 물론. 돈 5천 원(뒤에 오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6천 원)만 있으면 든든한 한끼를 먹을 수 있는 곳이 광주집이었다. 서울 시내, 그리고 식객들이 꼽는 순댓국집이 몇 곳이 있겠지만 내가 즐겨찾는 곳은 그 집이었다. 이 사실은 나에게 큰 자부와 추억과 정감을 안겨준다.
학교를 졸업하고 오가는 길이 여의치 않게 되어 자주 찾지는 못하더라도 시내에 나가면 꼭 들르는 곳이 이모의 광주집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 길엔 팔도가 다 들어차 있었다. 충청도, 강원도, 서울집 등등 한 시절 그 거리에서 요기를 하며 시틋한 영혼을 달랜 사람이 나 뿐은 아니었다. 배우 최민식은 후배 공형진과의 술자리를 그 점포들 어느 곳에선가 가지며 이런 얘기를 했다. ‘파이란’의 크랭크업이 끝난 얼마 후였다.
“형진아, 네 연기 좋았다. 근데 우리가 이 상태로 다시 크랭크인에 들어가면 얼마나 더 좋은 연기가 나오겠냐.”
진한 배우들이 진심을 담은 말이 오가는 곳이 광주집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이 흘렀다. 시내에 들러 가끔 오는 동안에 나는 나이를 먹어갔고 이모는 늙어갔다. 한 번씩 갈 때마다 힘에 부친 모습이 보였다.
“이모, 거 이제 그만 해요. 능력 있는 아들한테 대접받고 살라고.”
객쩍은 말이었다.
“그런 말 하지 말어. 여기는 내가 움직이는 동안 지킬 거야. 삼촌은 가끔 와서 밥이나 팔아주면 돼. 왜 비싼 밥, 비싼 술 먹으면서 시시한 얘기나 하고 그래.”
이모가 뾰루퉁한다. 나는 그녀의 반응이 궁금했고 건강이 염려됐다. 한편으론 나이를 들어서도 언제든 계속 올 수 있는 이곳이 영원하기를 바라면서도 그녀가 아픈 다리를 끌고 장사를 하는 것을 그만 보고도 싶었다. 두 바람 사이에 절충점은 없었다.
얼마 전 인사동, 낙원동을 갈 일이 있었는데 익숙한 지점이 낯설어졌다. 광주집이 있던 자리에 다른 가게가 생긴 것. 순댓국 골목이라 동종의 점포가 생기었으나 이모가 아니었기에 나는 낙심했고 그날은 돼지고기가 물려 인근에 냉면을 먹으러 갔다.
광주집이 없어지다니. 광주집은 영원할 줄 알았는데. 시방 이모의 자취는 알 수가 없다. 손님들의 객담처럼 돈 잘 버는 아들한테 갔는지, 아니면 다리가 아파 요양치료를 하는 요양원에 갔는지, 또 다른 곳에 작은 점포를 마련해 거기서도 돼지고기를 써는 지. 이모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못했는데 이모는 사라졌다. 기다려주지 않았다. 기다려달라는 무망한 부탁도 하지 못했지만.
사라져버린 광주집을 보며 내 20대 기억의 한 귀퉁이가 잘리는 기분이다. 집회를 하다가도 배가 고프면 그 집을 찾았고, 서점에서 책을 읽다가도 속이 비면 그 집에 들렀다. 이모는 어디로 가 어떻게 지내는 중일까.
오목하고 뭉근한 국에 식감 좋은 돼지고기, 구수한 밥에, 달큰한 깍두기까지 메뉴는 조촐했어도 이모가 우리에게 내줬던 환대와 호의는 어마어마했다. 어디에 있건 그녀의 안식을 빈다. 한 시절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