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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환희 May 21. 2022

평택에 가다

평택은 추억과 정감이 어린 곳이다. 외할머니가 오래 터전을 이룬 곳. 할머니는 안정리라는 곳에서 하숙을 쳤는데 어렸을 적 기억엔 기지촌 누나들부터 미군, 군무원들, 하루 용역일을 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봄이면 제비가 날아왔고 여름이면 꽃과 과실이 자라던 곳이었다.


평택에 왔다. 지금은 헐고 새로 지어올린 할머니의 집터를 보고 싶었고 안정리 로데오라고 이름이 날 정도로 번화했다는 기지 앞 거리를 걷고 싶었다. 안정리는 전부터 K-6 캠프 험프리스가 있던 곳으로 용산 미군기지가 새로 이전을 하면서 마을에 개발 붐이 일어났다. 험하고 위태로워 보이던 기지마을이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고 들었다. 이와 반비례해 용산 기지의 배후 상권으로 이름이 났던 이태원은 조그라 들었다. 마치 수원역전처럼 지금은 동남아 노동자들이 회포를 풀거나 하는 곳으로 변모했다는 전언이 있었다.


수원에서 평택은 기차역으로 한 정거장밖에 안 되는 곳이라 흡사 서울에 살던 때 이태원을 가는 기분이었다. 할머니가 평택에 살적엔 신도림에서 평택까지 지하철을 타고 오갔다. 급행 열차에 올라 좌석에 앉으면 그날은 운이 좋은 날이었다. 기차로 오가면 편할 곳을 미처 알지 못하고 지하철로 고생고생을 했다. 일반 열차에 올라 자리에 앉지 못하고 평택까지 가려면 꽤나 고생해야 했다.


평택역

평택역에 내렸다. 그 오래전에도 AK플라자는 있던 터라 역이 얼마나 커졌으랴 싶었는데 그 사이 증축을 했는지 서울의 웬만한 몰 못지않은 크기와 시설이었다. 평택역 앞 오거리는 여전했고 택시와 버스 정거장이 새로 생겨 교통에 질서를 도모한 듯했다. 역 옆엔 시외버스터미널이 자리했다. 우리 집이 강서가 아닌 송파에 있을 적엔 동서울터미널이나 가락시장 앞에서 버스를 타고 평택에 갔다. 오산과 송탄을 거쳐 가는 버스였다.


시내를 향해 눈을 돌리니 익숙한 풍경이 들어왔다. 평택역 광장을 기준으로 뒤편으론 아파트 대단지가 들었지만 평택은 상전벽해의 변화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새로 들어선 상점들도 오랜 상점들, 건물들과 조화를 잘 이뤄가는 듯 보였다.

20번 버스는 안정리로 간다. 늘 이 버스를 타고 할머니 집에 가곤 했다. 정류장의 위치가 헷갈렸지만 여전히 운행된다는 사실에 작은 안도감이 들었다. 변화를 긍정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들에 안심하는 성격이기도 하다. 버스는 전통의 통복시장을 거쳐 안정리로 향했다. 역을 위로 지르는 고가가 사라졌다는 점도 눈에 들었다. 버스는 기찻길을 지나 건물 숲을 건너 평택평야가 보이는 길에 접어들었다. 물로 가득 메운 못자리가 가지런한 논들이 보였다.


안성천을 건넌다. 평택은 예부터 안성과 반분된 느낌이었고 안성 저편부터 흘러내려온 안성천의 물길이 평야의 생장을 이뤄지게 했다. 무더운 날씨의 시작, 천에 뛰어들어 세상모르게 까불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현실성이 떨어지는 망상.


팽성읍으로 접어든다. 우측으로 빠지면 도두리, 대추리. 대추리 대투쟁을 기억한다. 학부 2학년 즈음에 벌어진 일이었다. 미군 기지가 이전한다는 소식에 고래로 거주하던 주민들이 반발하면서 사건은 시작됐다. 정부의 일방적인 토지 수용 소식에 주민들의 반발에 연대하던 수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투쟁으로 함께 했던 때가 있었다. 결국 투쟁은 진압되고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은 새로운 정착촌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이후의 일은 모른다.


안정리에 진입하는 버스 차창으로 익숙한 풍경들이 보였다. 어릴 적엔 안정리 초입에 자리한 팽성 주유소를 보면서 비로소 안정리에 도착했구나 마음이 편안해졌다. 버스는 주유소를 끼고 좌회전해 캠프 험프리스로 나아간다. 새로 지어올린 건물들은 별로 없었다. 도시 사람들의 호들갑은 안정리를 이태원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신흥 번화가로 둔갑시켰다. 오피스텔과 주상복합 건물 몇 곳이 눈에 띄었다. 서울이나 수원에서 평택 안정리 앞에 새로 건축한 오피스텔 분양 전단지를 몇 장 받았다. 실제로 보니 근사하긴 했다.

K-6기지 앞에서 내렸다. 캠프 험프리스란 간판이 정문에 게첩돼 있었다. 마침 내가 평택에 온 날은 미국 대통령이 오산 공군기지를 통해 한국에 와 평택 삼성공장 등을 둘러봤던 다음날이었다. 험프리스는 오지 않았다는데 2박 3일 일정에 마지막 날에 들르지 않을까 했다.



미군 독립기념일이 되면 기지가 열렸다. 지역주민들을 초청해 핫도그와 햄버거 패티도 구워주는 행사를 열었다. 그 풍요로움을 맛보며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 어린 마음에 헤아려보려 하기도 했다.


캠프 험프리스는 미국의 주둔 미군기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축에 든다고 들었다. 한미동맹의 견고한 유지 아래 미국의 대 아시아, 태평양 전략, 전술에 큰 지지축이 된다는 말도 들었다. ‘We go together’란 말의 상징성을 생각했다.

험프리스 기지 앞에는 안정리 로데오 거리가 마련돼 있다. 어릴 적 이 곳에 왔을 때를 기억한다. 험상궂고 몸이 큰 미군들이 성큼성큼 걸어 다니며 사람들을 위협하는 것처럼 느껴졌고(사실이 아니지만), 분냄새가 지독하게 나고 야하게 차려입은 누나들이 거리에 가득했다. 실제 이곳은 우범지대였다. 할머니 집으로 건너가는 언덕이 있었는데 길가에 나이트클럽이 하나 있었다. 나이트클럽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풍문도 있었다. 어린 나이에 진상에 근접할 수는 없었으나.



로데오 거리에 자리한 온갖 가게들을 둘러본다. 케밥 집이 꽤 많았고 수제버거집도 상당한 숫자. 맞춤 양복점과 피자집, 환전소, 전당포, 가볍게 맥주 한 잔 할 수 있는 펍도 있었다. 전보다 온화해 보이는 거리.


마침 점심시간이라 뭘 먹을까 고민을 하다 수제버거로 메뉴를 정했다. 가격은 상당했는데 먹기로 했다. 먹을 만했고 배가 불렀다.

할머니의 옛 집터

배가 부르고 이제 할머니가 살던 집터로 가보기로 한다. 도로가 잘 닦인 곳도 있지만 포장이 들쭉날쭉하고 아스팔트가 부풀거나 찢겨져버린 곳도 많았다. 안정리의 발전상엔 눈을 비비고 보면서 여전히 낙후되어 있는 마을의 속살을 발견한다. 고샅이라고 할 만한 골목을 이리저리 들어가 할머니의 옛 집터를 본다. 이미 신축 빌라가 우뚝하니 솟았다. 새로운 건물에 새로운 터전이 들어서는 건 당연하지만 서운한 마음도 있었다. 빌라 옆에 자리한 오랜 집들을 마주했을 땐 더더욱. 무심상히 사진 하나를 찍고 돌아선다.


어릴 때 가서 놀이기구를 타곤 했던 팽성청소년문화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매끈한 놀이기구들에서 지나버린 세월을 실감한다. 잘 깔린 우레탄 바닥만큼이나 두꺼워진 내 얼굴과 나이를 생각했다. 속절없는 생각이었다.


안정리를 한 바퀴 돌아본다. 안정리 마을 커뮤니티라는 대대적인 공사가 진행 중이다. 독서광장부터 행사장, 놀이터 등의 시설들이 한 곳에 모인다는 구상이었다. 그게 들어설 즈음이면 안정리는 또 어떤 변화를 맞이할까.


캠프 험프리스가 확장할 때 서둘러 배후 상권에 모여 들었던 상인들이 생각하는 요즘은 어떨지 궁금했다. 분명 전성기를 지나 성숙 혹은 안정기에 든 상권이다. 경기는 침체됐지만 물가는 앙등해 높은 식대와 용역료를 책정할 수밖에 없는 상인들의 가시권에 들어온 스태그플레이션이랄지.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평택, 안정리 행이었다. 이제 할머니는 세상에 없고 이 동네를 추억할 사람이 한국에는 나밖에 없다. 추억을 추억하고 싶을 때 이 곳에 종종 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제비가 보인다. 평택 정도로 하향해야 볼 수 있는 새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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