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윤리의 독특성

세상 법칙에 균열 만들기

by 홍하영

앞서 살펴보았듯이, 하우어워스는 이야기와 이야기 공동체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요. 이야기는 언제나 공동체 안에서 들려집니다. 반대로 공동체 없는 이야기는 상상할 수도 없죠.


하우어워스는 이것을 곧바로 기독교 윤리에도 적용합니다. 기독교 윤리도 이야기와 이야기 공동체, 즉 기독교 전통과 교회에 의해서 ‘만’ 가능하다고요. 하우어워스가 이토록 이야기와 공동체를 강조하고 있는 까닭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핵심인 '제자도'를 오해하며 길을 잃었다는 뼈아픈 반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 두 부류: 이야기가 없거나, 공동체가 없거나

하우어워스는 현대 기독교 윤리의 지형을 두 가지 부류로 진단합니다. 한 부류는 구원을 개인의 경건과 구원으로 보는 부류이고, 다른 한 부류는 구원을 사회 변혁과 정의로 보는 부류입니다.


겉으로만 보기에 이 두 입장은 모두 납득할만하며, 도드라지는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하우어워스는 이 두 모델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두 부류 모두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과 ‘교회’를 분리해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부류는 기독교 이야기는 받아들이지만, 이를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이해합니다. 이 이해에 따르면 구원은 개인의 삶의 변화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굳이 옆사람을 전제할 필요가 없습니다. 옆사람이 없어도 나 혼자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고 믿는 거죠. 공동체가 부재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공동체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국가주의나 자본주의의 논리입니다. 이들은 개인적으로는 경건할지 모르나, 사회적 영역에서는 국가의 논리를 비판 없이 수용하는 모순에 빠지곤 합니다.


반대로 두 번째 부류는 사회 변혁을 기독교 윤리의 중심에 둡니다. 그러나 세상과 소통하겠다는 명목하에 기독교만의 독특한 언어와 색채를 지워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복음을 보편적인 인권이나 민주주의 언어로 번역해 버리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렇게 교회는 일반 사회 운동 단체와 구분되지 않는 무색무취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우어워스에 따르면 위 두 부류 모두는 기독교 윤리의 독특성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독교 윤리가 모두가 받아들일만한 보편적인 윤리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우어워스에 따르면, 복음이 보편적인 상식이 되는 순간, 교회는 세상을 향한 대안적 비전을 제시할 힘을 잃게 됩니다.




2. 모든 윤리에는 독특성이 있다.

하우어워스에 따르면 모든 윤리는 전통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똑같은 '장기 기증'이라는 행위를 두고도, 사람이 어떤 전통(이야기) 속에 사느냐에 따라 그 윤리적 판단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공리주의 전통을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명의 희생으로 다섯 명을 살릴 수 있다면 그것은 가장 합리적이고 선한 선택이다."라고 생각할 겁니다.


한편 유교 전통에 서 있는 사람은 장기기증을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을 훼손하는 것은 불효이자 윤리적이지 못한 일이다."라고 이해할 것입니다.


만약 자유주의 전통을 지지한다면 "내 몸에 대한 권리는 나에게 있다. 기증 여부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며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다."라고 이해할 것이고요.


이처럼 어떤 이야기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하나의 사안에 대해서 내리는 윤리적 결정은 달라집니다. 하우어워스에 따르면 기독교 윤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윤리는 세상의 보편 이성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라는 독특한 문법을 배울 때만 구사할 수 있는 일종의 언어입니다.




3. 기독교 윤리의 독특성

하우어워스는 기독교 윤리의 독특성을 보여주는 최고의 예시로서 '산상설교'를 이야기합니다. 그는 산상설교가 모든 인류를 위한 보편적 도덕 원칙이라는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해요.


예수께서는 “~라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 당대 유대 사회에서 보편타당하다고 믿어왔던 '법칙'들에 균열을 내십니다.


이에 하우어워스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세상의 상식에 부합하는 보편적인 선을 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논리에 저항하는 특수한 삶을 사셨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기독교 윤리란 문화의 대세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라는 독특한 정치적 선택을 내리는 것입니다.




4. 공동체를 상정하는 윤리

결국 하우어워스가 말하는 기독교 윤리의 종착지는 머릿속 관념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실제적인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죠. 산상설교를 듣던 사람들도 각자 흩어진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공동체로 부름 받았습니다. 이 공동체는 세상과 어떻게 다를까요?


보통 윤리라고 하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를 먼저 고민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셨다는 그 '비전'이 우리 눈에 들어올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비록력과 용서)을 선택할 용기를 얻게 됩니다.


하우어워스에게 종말은 먼 미래의 공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방식(폭력과 효율성)은 이미 끝났다고 선언하는 아주 현실적인 사건입니다. 비록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조금 늦어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교회는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교회는 세상이 보잘것없다고 여기는 이들을 섬기며, 세상은 꿈도 꿀 수 없는 새로운 삶의 대안을 몸소 증명해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우어워스가 강조하는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이래라저래라 훈수 두는 기관이 아닙니다. 교회 스스로가 하나님의 이야기가 살아 움직이는 대안적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세상은 교회를 거울삼아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을 발견하고, 전혀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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