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열매를 맺어보길!
혼자 텃밭에 간 남편이 흥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감자에 꽃이 피었어!"
감자꽃? 감자가 꽃이 피던 식물이었나?
도시에서만 44년을 살아온 나는 감자가 꽃이 피는 식물인지 몰랐었다. 울퉁불퉁 갈색 모양에 학교에서 배운 대로 덩이줄기 식물이라는 것. 그것 외에 사실 감자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다.
음... 그래도 왕년의 분자생물학도인데......
사물의 전체를 꿰뚫지도 못하고, 본질을 알겠다고 설쳤으니, 계속 그 길을 못 걷는 건 당연한 결과였구나. 일단 지나간 세월 반성부터 하고, 혼자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았다.
무엇보다, 내가 감자꽃의 존재를 몰랐던 것은, 본 적이 없어서이다. 감자에 싹 난 것은 자주 봤으니, 감자 자체가 열매라는 생각을 무의식 중에 해 왔던 것 같다.
사실 감자는 눈이 생긴 부분을 잘라내서 땅에 묻으면 거기서 뿌리도 나고, 잎도 나고, 새로운 감자도 달린다.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면 각각의 부분이 독립된 새로운 개체들로 재생되는 플라나리아나 불가사리같이 뛰어난 자기 복제능력이 있는 생물인 셈이다. 그토록 사람들이 방법을 알고 싶어 하는 클론의 능력이랄까!
하지만, 이렇게 생긴 개체들은 유전적으로 100% 일치한다. 아빠는 없고, 엄마만 있는 셈이니 당연한 이야기다. 다 같이 맛있을 수도 있고, 다 같이 맛없을 수도 있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다 같이 병이 들 수도 있다는 거다. 우리 사람들은 , 다들 DNA가 다른만큼, 질병에 견디는 능력도 달라서, 독감이 유행일 때 걸리는 사람, 안 걸리는 사람 다 있지만, 이 감자들은 병충해가 돌면 다 같이 쓰러진다는 이야기다. 아... 애처로워라.
혼자 감상에 젖어 있는데, 남편한테 두 번째 전화가 왔다.
"감자꽃은 영양분을 덩이줄기로 가는 걸 빼앗아가기 때문에 잘라야 한대! 잘라야겠다!"
응? 잘라야 한다고?
내가 감자꽃을 본 적이 없었던 이유가, 농부들이 감자꽃을 다 잘라버려서였나?
조금이라도 큰 감자를 얻고자 꽃을 자르고, 감자 줄기에 집중을 했나 보다. 도시인의 감성으로는 서글픈 일이지만, 한 알이라도 더 비싸게 팔아야 하는 농부의 심정이라면 당연한 선택과 집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농부는 커녕, 흉내도 겨우겨우 내는 우리가 꽃을 자를 필요가 있나?
나의 반론은 입 밖으로도 나오지 못했다. 이미 부지런한 남편이 감자꽃을 다 잘라버린 후였기 때문이다.
문득, 초등학교 근처도 못 가봤다던 아빠의 동갑 동생인 오촌 고모가 생각났다.
나란히 세워진 집에서 사촌 오빠들, 사촌 동생들, 본인 동생들이 학교 갈 때마다 혼자 울곤 하셨댔는데...
줄기 줄기 이어진 핏줄들이 못 배워도 고졸, 대졸까지 마치는 동안 그 심정이 어때셨을까.
감자꽃 같은 그녀... 여자라고 못 배운, 첫째라서 학교 문턱도 못 밟았던 그 시절이 참 서글프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감자꽃 같은 그녀들이 있을까. 여자라는 이유로, 열심히 돈 벌어서 남자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던...
하지만, 그렇게 배운 남자들이 일으켜 세운 건 본인이요. 본인 가정이요. 본인 집안이지, 그녀가 아니다. 세상이 감자만 기억하고, 감자꽃은 모르는 것이 감자꽃 탓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뒤늦게 피어날 감자꽃은 키워봐야겠다. 얼마나 보잘것없는 감자들이 달려 나오는지, 그 책임이 감자꽃에 과연 있는 건지 내 눈으로 보고 싶다. 꽃이 핀다면, 씨앗도 있다는 법... 감자꽃의 꺾여버릴 뻔한 꿈도 지켜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