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둠 속에서 비로소 바라볼 때

20대 초중반, 방황 속에서 비로소 발견한 파랑

by 혜성

[수면] 오일 파스텔, 수채 색연필


세상에는 어찌할 수 없는 흐름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 진리처럼. 내가 잘하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며,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내 길이 아닐 때가 있다. 넓은 바다 한가운데 몸을 맡기고 있으면, 의지할 곳 없는 몸은 잔잔한 바다의 작은 파장에도 사정없이 흔들린다.
바다의 흐름은 멀리서 볼 때 잔잔하고 고요해 보이지만, 그 흐름 속에 맡긴 몸은 이따금 떠밀리고, 때로는 가라앉을 뿐이다.


20대 초반의 나는 대학에 입학해 당시 학교에서도 주목받던 우리 학과의 광고 동아리에 들었다. 선배들과 교수님께 실력을 인정받았고, 신문사의 광고제에 참여해 상도 여럿 타게 되었다. 나의 진로는 굉장히 손쉽게 정해졌다. 미래에 대한 별생각 없이 시간이 흘러갔고, 졸업을 하기 몇 개월 전에 작은 광고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네가 그것을 가장 잘하니까”라는 말로 조금 이른 첫 시작을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쉽게 결정한 만큼 첫 직장에서의 시간은 쉽게 마무리되었다.

사회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단 생각에 수면 위에 떠 있던 나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주변 친구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또 조금씩 흔들렸다. 남들과 비교하며 문득 ‘나는 지금 행복한가?’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 의문은 작은 파장이 되어,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한 내 삶의 방향성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앞으로 나의 길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짧게 마무리한 광고회사를 뒤로하고 나는 출판사, 웹 에이전시, 투자회사 등 많은 곳을 전전했다. 그럴수록 내 바다는 점점 넓어졌지만, 여전히 어딘가엔 닿을 수 없는 표류가 계속되었다. 무언가에 만족할 수 없었고, 좋아하는 것에서 인정받기 어려움을 깨달았다. 수면 위에서 내가 바라보는 곳은 밝고 맑은 파랑의 하늘인데, 내 이상과는 다른 수면 밑의 어두운 파랑이 나를 감쌌다.


그렇게 나는 점점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한동안 깊은 수면 밑의 어둠에 잠식당한 채, 친구도 부모님의 연락도 뒤로하고 아무와도 만나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 해야 할 이유와 목적도 찾지 못했다. 오히려 작은 흔들림에 걱정하던 수면 위의 과거의 나는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꿈이 많던 사람이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깊은 수면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현재의 내 앞에는 그저 공허한 어둠만이 가득했다. 어쩌면 오랫동안 고고하게 수면 위만 떠 있던 내가 헤엄치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헤엄치는 법을 혼자 깨우치는 것은 꽤나 고되었다. 발버둥 치면 칠수록 가라앉기만 할 뿐이었으니까. 문득 어디서 들었던 말이 기억났다. 수영을 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몸에 힘을 빼는 것’이 첫째라는 그 말이.


세 번째 회사를 그만두고 충동적으로 엄마와 한 달간 유럽 여행을 떠났다. 무모했지만 용기 있게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떠난 여행이었다. 조금씩 모으고 있던 돈도, 미래를 위해 아껴두던 계획들도 모두 포기했다. 완전한 타지에서 길을 잃기도 해 보고,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도 경험해 보았다. 발길이 닿는 곳을 따라 마구 걸어도 보았다. 덕분에 나는 헤엄을 치는 법까진 아니지만, 힘을 빼는 법을 배웠다. 항상 완벽하진 않지만, 인생을 나아감에 있어 유연함을 깨우쳤다.


나는 수면을 향해 점점 떠올랐다.

깊고 어두운 파랑을 뒤로하고, 점점 밝아졌다. 밝은 곳에서의 빛은 너무도 당연해 눈에 띄지 않지만, 어둠 속에서는 빛이 더 잘 보인다고 했던가. 어둠 속에서 비로소 수면을 바라보았을 때 너무나도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작은 파장에도 쉽게 가라앉아버렸던 예전의 내가 있던 곳이었다. 하늘과 바다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해 불안해했던 나였지만, 그 덕분에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떤 선택이든 할 수 있었다는 것을 그땐 알지 못했다. 비록 멀리 서는 잔잔해 보이는 바다일지라도 그들 나름의 흔들림은 존재한다. 헤엄을 칠 때 몸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없듯이, 조금씩 흔들리며 각자의 바다를 파랗게 물들인다.


어둠 속에서 비로소 빛을 바라볼 때 사람은 떠오르게 된다.

그곳이 수면 위였던가, 수면 아래였던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지금 이 순간도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중이지만, 더 이상 가라앉지 않는다.


그저 밝은 파랑을 향해 조금씩 떠오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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