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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Feb 08. 2019

물처럼 섞이고 싶은 기름 <셰이프 오브 워터>


2018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을 포함한 4개 부문 수상을 성공한 <셰이프 오브 워터>는 단연 2018 시상식의 주인공이었다. 한국 개봉 전부터 이미 해외 유수 시상식에서 여러 상을 수상한 이 영화는 개봉 후에도 평단과 관객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판의 미로>, <헬보이>, <퍼시픽 림> 등의 영화를 통해 기괴한 크리처, 어두운 판타지 세계관 등 관객들에게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을 각인시킨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자신의 스타일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냉전시대 미국을 배경으로 언어장애가 있는 기밀시설 여성 청소부 엘라이자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생물체의 사랑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간단한 스토리의 괴수물은 대체 어떤 이유로 극찬을 받고 있는 것인가? <셰이프 오브 워터>는 이 흔하고 간단한 스토리에 스타일과 정치적 올바름을 주입했다.


델 토로 감독은 앞서 서술한 것처럼 영화 안에서 자기만의 스타일이 확실히 드러나는 감독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 역시 세상은 어둡고 여주인공과 사랑에 빠져야 할 크리처는 사랑하기엔 너무나 기괴하게 생겼다. 하지만 델 토로의 스타일이 영화에 동화적 분위기를 부여해 이 기괴함을 중화시킨다. 영화 속 세상은 어둡고 가혹하지만 암흑이 아니라 푸르스름한 색감이 공간을 채우며, 감미로운 음악은 청각을 마비시킨다. 영화를 보다 보면 감독이 스타일에 특히 힘써 연출한 부분들이 몇 장면 보인다. 특히 엔딩씬은 영화라는 매체가 형식의 예술임을 증명하듯 러닝타임 동안 쌓아 왔던 이미지, 스토리, 메시지의 모든 것을 집약해 한 장면으로 보여주는 아주 인상적인 씬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장면들은? 델 토로 감독은 상업 영화 주로 만들긴 했지만 작가주의 성향이 꽤 강한 감독이다. 그런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서 어디서 본 듯한, 관성적인 연출을 여러 장면에서 보여준다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다.



괴생물체와 엘라이자의 짧지만 강렬한 베드씬(?) 직 후 엘라이자는 비 오는 밤, 버스를 타고 생각에 잠긴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버스 유리를 관통해 행복한 기억을 회상하고 있는 엘라이자를 잡는다. 엘라이자의 얼굴 위로 밤거리의 붉은 불빛들이 은은하게 반사되고 유리에 맺힌 빛 방울들은 OST에 맞춰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은 영화 <캐롤>이 반복적으로 보여준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장면들과 너무나 닮았다. 구도나 구성만 놓고 보면 그냥 흔한 클리셰 중 하나 일 수 있겠지만 괴생명체와 인간의 성관계라는 충격적인 장면을 직접 보여주는 것 대신 들어간 전략적 씬이 클리셰로 이뤄졌다면 그건 그것대로 실망스럽다. 또한 두 영화 모두 소수자의 사랑을 다룬 영화라는 점에서 이 장면이 상징하는 속성을 생각해 봤을 때, 이는 전혀 특별하게 다가오지도 않는다. 마치 <그래비티>에서 조지 클루니와 산드라 블록이 낙하산 끈에 몸이 얽혀 서로를 구하려고 애쓰던 씬을 보고 <마션>에서 제시카 차스테인이 똑같이 끈에 얽혀 맷 데이먼을 구하려는 씬을 본 느낌이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상상 댄스 역시 마찬가지다. 예정된 이별을 앞두고 있는 엘라이자는 괴생명체와 식탁에 마주 앉아 슬픈 표정으로 마지막 식사를 한다. 곧이어 화면은 흑백으로 바뀌고 핀 조명이 떨어지며 음악이 흘러나온다. 2시간 동안 농아였던 엘라이자가 OST의 가사를 빌려 음성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은 아마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 일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괴생명체와의 춤. 영화 종막에 음악과 함께 회한에 잠기며 아름다웠던 기억들을 춤의 형태로 되새겨 보는 영화적 체험을 우리는 바로 작년 아카데미 수상 영화에서 경험한 적이 있다. 바로 <라라랜드>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상상 댄스 시퀀스에서 형식적으로 <라라랜드>와 유사성을 띠지만 <라라랜드>처럼 사운드트랙 한 소절로 앞선 서사들을 되살리는 전율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솔직히 무리수처럼 보였다. 그냥 좋은 OST를 극대화할 뭔가 극적인 장치가 필요했기 때문에 춤이라는 카드를 선택한 것 같았다. '있는 그대로' 존재를 긍정해줬기 때문에 사랑에 빠졌다는 이종의 커플이 가장 극적인 순간에 인간의 춤을 추는 형태로 '사랑의 모양'을 보여준다는 것은 이 영화가 자부하는 메시지와도 상반된다. 이 부분을 감독도 인식했는지 춤을 추는 순간 드레스로 환복 된 엘라이자와 달리 괴생명체는 턱시도를 입지 않고 맨몸 그대로 춤을 춘다. 다행히 대참사는 막은 것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디자인은 아름답고 형식은 약간 식상하다면 메시지는 위험하다. '타인을 차별하면 안 된다', '생명은 존중해야한다' 라는 명제를 부정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어떤 것이 차별이고, 어떤 것이 존중인가에 대해서는 개인마다 생각이 다르고 이 생각들은 항상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곤 한다. 영화 중반부에 괴생명체가 일라이자의 옆집 주민이자 친구인 자일스의 애완 고양이를 잡아먹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말리려던 자일스는 팔에 부상을 입었고 놀란 괴생명체는 집 밖으로 달아나버린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자일스는 걱정하는 일라이자에게 "난 괜찮아. 그는 야생동물이야. 뭐가 되라고 할 순 없어" 라고 타이른다. 그리곤 다치지 않은 고양이를 향해 "넌 운이 좋았어" 라는 말도 덧붙인다. 의도를 했건 안 했건 인간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한 괴생명체에게 무한한 신뢰를 주는 이 장면은 너무나 위선적이고 폭력적이다. 영화 속 괴생명체는 과거에 인간들과 접촉이 있었다는 설정이었고 수화로 인간과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점 등을 보았을 때 죽음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단세포는 절대 아니다. 그런 그가 본능(아마 식욕 같다)에 못 이겨 자신의 보호자격에 해당하는 자일스의 애완동물을 죽여버렸다. 말이 통하진 않지만 교감이 가능하다는 점은 괴생명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애완 고양이에게도 해당된다. 그런데 어째서 자일스는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괴생명체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인정해 주면서 함께 살던 고양이는 그냥 재수 없게 죽어도 어쩔 수 없는 소모품 취급을 하는 것일까? 괴생명체는 이족 보행이 가능해서? 아니면 그냥 처음부터 애완동물은 생명체가 아닌 자기 소유의 물건 취급을 한 것일까. 이런 차별적 존중이 카페에서 흑인을 내쫓고, 게이인 자일스를 내쫓은 카페 주인과 과연 얼마나 다른가. 괴생명체로 치환되는 소수자를 배려한답시고 엄연히 살아있는 생명을 죽게 만든 본능을 존중해주는 건 너무나 역겨운 짓이다. 최소한 자일스는 "넌 운이 좋았어" 라는 농은 뱉지 말았어야 했다. 델 토로 감독이 굳이 이 장면을 넣은 이유는 뒤에 이어지는 괴생명체의 신적인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애완동물의 죽음 앞에서도 빛나는 자일스의 '정치적 올바름'이 후에 대립해야 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 한' 악역들과 비교했을 때 더 광명을 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친절하던 카페 주인이 자일스의 사랑 고백을 듣는 순간 마침 들어온 흑인 손님을 내쫓는 연출은 너무 치사하고 직선적인 연출이다. 성소수자의 사랑 고백을 거부한 너 같은 인간은 보나 마나 흑인도 차별할 것이라는 말인가. 자일스가 여자였어도 스무 살 이상 많아 보이는 누군가의 느닷없는 고백은 충분히 불쾌하고도 남을 거 같은데 말이다. 요즘엔 슈퍼 히어로 영화도 무엇이 진짜 정의인지 고민하고 '정치적 올바름' 이라는 주제에 대해 예민하게 다가가려는 시도를 한다. 악을 때려 부수는 스펙터클이 주 목적인 영화도 입체적인 악, 뒤틀린 선을 만드려 노력하는데 정치적인 이슈를 정면에서 다루는 <셰이프 오브 워터>의 이런 이분법적인 태도는 선동적이기까지 하다. 이 영화에서 악역에 해당하는 인물은 모두 백인 남성이고 정의의 편에 해당하는 인물은 장애인, 흑인 여성, 성소수자, 이방인, 괴생명체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와중에 흑인 남성은 애매한 변절자의 포지션을 갖는다는 점이 이 영화의 의도를 더 확실하게 보여준다.

델 토로 감독은 매혹적인 엔딩으로 마침내 모든 차별과 편견을 극복한 사랑의 한 모양을 보여준다. 이것은 어른들의 동화이자, 현대의 우화, 애절한 로맨스 영화의 모양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화면은 모든 것이 조화를 이뤘다는 착각에 들게 하지만 사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조화는 주류에서 외면당한 소수자들만의 연대, 물에 섞이지 못한 기름의 연대다. 이 영화가 뜨거운 반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기름은 가연성 물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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