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가는 길
― 이천 가는 길, 아버지를 다시 만나다
작년부터 남동생과 조용히 마음을 모았다. 이천 평화공원 (납골당)에
연세가 많아지신 어머니를 모시고, 날씨 좋은 날 셋이 함께 다녀오자고 계획했었다.
그날은 햇살이 유난히 따뜻한 봄날이었다.
어머니는 오래도록 홀로 우리를 키우셨고,
아버지는 오랜 세월 연락 없이 지내셨다.
이천으로 향하는 길은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내 마음 깊숙이 오래 묻어두었던 시간을 다시 꺼내는 여정 같았다.
“이제 아빠는 엄마랑 살지 않아”
내가 여덟 살이었을 때,
아버지는 커다란 트렁크를 들고 내게 조용히 말씀하셨다.
“이제 아빠는 엄마랑 살지 않아.
당분간 널 볼 수 없단다.
엄마 말씀 잘 듣고, 건강하게 지내렴.”
그 말을 듣던 어린 나는
왠지 모르게,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날의 공기, 아버지의 목소리, 트렁크 손잡이를 쥔 손...
그 모든 것이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무렵 나는 국민학교 5학년이었다.
엄마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며 우리를 돌보셨고,
나는 학급회장을 하며 조금이라도 엄마를 덜 힘들게 하고 싶었다.
아버지를 다시 본 건 중학생 때 한두 번 정도.
그리고 결혼 후, 큰아이를 낳고 몇 년이 흐른 어느 날,
아버지가 집 근처로 찾아오셨다.
조용한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한 것이
부녀 사이의 첫 식사이자,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큰따님 되시죠?”
몇 해가 더 흐르고,
어느 날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요양원 사회복지사의 목소리였다.
“○○○ 할아버지가 입소하셨어요.
큰따님 되시죠?”
그 순간,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우린 오랫동안 어머니와 함께 살아왔고,
아버지는 또 다른 삶을 사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끝나갈 무렵,
낯익으면서도 먼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 한마디에
참았던 감정이 터지듯 눈물이 흘렀다.
“아빠, 내일 아침 일찍 찾아갈게요.”
하지만 아버지는 말했다.
“괜찮아.
너 오면 나 때문에 힘들어질 거야.
오지 마…”
그 통화가
정말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아버지의 마지막 길
다음 날 새벽,
요양원에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는 심정지로 세상을 떠나셨단다.
남동생과 함께 달려가
아버지를 모시고 양재 화장터로 향했다.
차 안에서 나는
하얀 천 위에 누운 아버지의 왼팔을 꼭 붙들고 있었다.
키가 크셨던 아버지.
야윈 얼굴, 솟은 콧날,
세월이 남긴 자국이 그 위에 고요히 내려앉아 있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부녀의 마지막 만남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이천 평화공원에 도착하니
햇살이 봄물처럼 따사로웠다.
어머니는 조용히 말씀하셨다.
“살아선 그렇게 고생하더니…
이젠 호텔에 있구나.”
오시는 내내 “너희 아빠랑은 층 다르게 해 달라”라고 하시던 어머니였지만,
막상 아버지 앞에 서시자, 말이 없으셨다.
우리가 준비한 음식을 제단에 놓고
남동생은 위패를 꺼내 정성껏 기도를 드렸다.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어머니는
작게 말씀하셨다.
“복도 많다… 니 아비는.
복도 많아.”
그 말이 가슴에 박혔다.
복을 누리지 못한 삶이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는다면
그 또한 한 생의 복일지도 모른다.
“나는 갈 곳이 있어서, 마음이 좋다”
돌아오는 길,
이천의 유명한 쌀밥집에 들러 따뜻한 밥을 먹었다.
푸른 하늘이 높디높아 보이던 날.
셋이 함께 한 그 한 끼는
말없이도 많은 감정을 나누었다.
며칠 뒤, 운동을 하시던 어머니가
문득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갈 곳이 있어서, 마음이 좋다.”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누군가에겐 무거운 말일지 몰라도,
우리 어머니의 입에서는
참 편안하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