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다 마신지 오래였지만, 우리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인가, 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길에서 친구들이랑 고무줄을 하고 있었어. 그 시절, 우리는 자주 여기저기서 고무줄을 했지. 그때에는 세탁소과 미용실 사이에서 고무줄을 했어. 우리 집에서 그렇게 먼 곳도 아니야. 한 15미터 정도 되었을 거야. 그날따라 친구들이 빨리 집에 가봐야 한다고 하더라고. 결국 나까지 해서 세 명인가, 네 명 남았는데, 우리는 고무줄놀이를 더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어. 그때 세탁소 아저씨가 우리를 불렀어. 그 아저씨는 노총각인데, 그동안 우리에게 크게 관심이 없었거든. 근데 그때 우리를 부르더니, 자기를 도와주면 500원을 주겠다는 거야. 각자 오백 원씩이래. 그 돈이면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다른 것도 사 먹을 수 있으니깐 우린 뭔 일이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한 명씩 부르면 자기한테 오라고 하더라고. 먼저 다른 친구가 가고 다른 친구들이랑 나는 순서를 기다렸어. 내가 몇 번째 방에 들어갔는지는 모르겠는데, 친구가 그 방에서 나오면서 아저씨가 너 오래, 하고 한 것 같아. 그래서 들어갔다가 오백 원을 받고 나왔어. 나와서 친구들이랑 서로 이상하다고 이야기를 나눴어. 벌써 아이스크림을 사 먹은 애도 있었고, 집에 먼저 간 애도 있었어. 나는 아무래도 이상해서 우리 집 앞에서 아줌마들하고 이야기 나누고 있는 엄마한테 가서 말했어. 세탁소 아저씨가 내 입에 자기 고추를 넣고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움직이더니 오백 원을 줬다고. 엄마는 얼굴이 순간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세탁소 아저씨한테 가서 따져 물었어. 세탁소 아저씨는 자기는 아까부터 가게에 나와서 일하고 있었는데 무슨 소리냐고 더 크게 화를 냈어. 내가 상상해서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거야. 나는 엄마랑 아저씨가 싸우는 게 너무 무서워서 엄마한테 그냥 가자고만 했어. 그러고 그 기억을 한참 동안 잊었어. 다시 생각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였어. 갑자기 어느 날 그 기억이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다시 돌아온 거야. 초등학교 1학년 때는 내가 대체 뭘 경험한 건지도 몰랐다가 그 상황을 파악하고 분노할 수 있을 때 다시 생각난 거지. 그 아저씨를 찢어 죽이고 싶었어. 그리고 엄마도 그렇게 밉더라고. 어느 상담가의 이론서를 읽다가 사례 중 하나로, 수잔이라는 여자애가 상담을 받다가 어릴 적 성폭행을 당한 기억이 잠재되어 있다가 열아홉 살에 떠올라 밤마다 예전에 살던 곳으로 가서 칼을 들고 서성였다는 거야. 그 남자를 죽이겠다고. 나만 겪은 이례적인 일은 아니라는 걸 알았어. 나도 식칼까지는 들고 헤매지 않았지만, 일부러 그 아저씨가 하는 세탁소를 서성이면서 그 아저씨를 살펴봤어. 그 아저씨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더라고. 그다음에는 일부러 드라이클리닝할 옷을 들고 가서 맡겼어. 나를 기억하나 보려고. 전혀 모르는 것 같더라고. 아님, 내가 누군지 알았더라도 자기가 나한테 뭘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을 수도 있지. 그 사람을 죽이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를 거야. 어쩔 땐 내 살이 찢겨 나가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어. 빛도 공기도 없는 우주공간에 나 혼자서 살이 뜯겨져 나가는 것 같은 그런 느낌. 그래서 아토피가 생겼나?"
친구는 자신의 백금발로 탈색한 머리를 자꾸만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몇 가닥이 빠지기도 했지만,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런 대화를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린 서로 엄청난 무게의 이야기를 꺼내는데, 누구도 감정을 극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고, 서로의 이야기에 반응하지도 않았다. 그저 한 사람이 얘기를 시작하고 끝내면, 잠시 침묵이 흐르고, 다시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다음 이야기를 이어나간 건 작가 지망생인 친구였다. 평소에는 말하는 것보다는 문자로 더 많은 얘기를 나누던 친구였다.
"난 스물네 살에 3년 사귄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그 뒤에 다른 사람을 잠깐 만났어. 그런데 내가 자기를 안 좋아한다고 하면서 사귄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헤어지자는 거야. 나는 아니라고 하면서 그 사람을 잡겠다고 그 사람이 사는 대전에 기차를 타고 갔지. 집 주소는 모르니깐 대전역에서 한참을 기다렸어. 그러다가 밤이 되어서야 그 사람하고 다시는 안 될 거라는 걸 알고 그 사람이 줬던 선물, 내가 주려 했던 선물을 모두 버리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지. 이전에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의 이별에 대한 아픔이 유보되었다가 짧게 사귄 그 사람과의 이별에서 폭발한 건지도 모르지. 그러고 나서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가 함께 여행을 가자는 거야. 기억이 쪼개져 있어서 잘은 기억이 안 나는데, 서울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서 그 친구를 짝사랑하는 애가 하도 놀러 오라고 해서 나랑 같이 간 거야. 숙소도 다 준비되어있다고. 그 친구 차를 타고 놀러 갔어. 거기서 그 남자애 형, 동생 하는 애들도 같이 나왔는데, 그중에 내가 대전까지 가서 만나려고 했던 남자애랑 비슷한 애가 있는 거야. 사실 비슷한 점도 없었는데, 내가 그냥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 같아. 몸이 안 좋았는데 그 남자애가 권하는 술을 거부하질 못했어. 왠지 친구를 위해 내가 분위기를 띄어야겠다는 생각과 헤어진 전 남자친구와 닮은 애가 있어서 괴로워서 술을 계속 마신 것 같아. 기억나는 건 컴컴한 방 안에서 내가 그 남자애를 밀어내고 있었던 거야. 미친 듯이 벗어나려고 하는데, 몸이 맘대로 되지 않았어. 그러다가 또 기억나는 건 환한 불빛 아래서 술 취한 다른 남자애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어. 나는 막 소리 내서 울었던 것 같아.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친구가 옆에서 자고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방 한구석에 내 팬티가 놓여 있는 거야. 나는 옷을 입고 있는데. 친구가 일어나기 전에 빨리 속옷을 다시 입었지. 뭐가 뭔지 기억이 다 나진 않지만, 친구와 차를 타고 돌아가면서 간밤에 기억나는 대로 다 이야기했어. 친구는 그러게 술을 왜 그렇게 마셨냐고, 사람 좋은 얼굴로 그냥 잊으라고 했지. 그런 친구에게 나는 좀 짜증을 낸 것 같아. 나를 좀 챙겨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함께 여행을 다녀온 친구뿐 아니라, 그 친구와 같이 알고 지내던 다른 친구들도 다 내 연락을 안 받더라고. 내가 외면당하고 있다는 게 분명하다고 느끼고 한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어. 무슨 이유에서 내 연락을 안 받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신 연락 안 하겠다고. 내가 문자 보낸 친구는 심지어 나랑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친하던 사이였는데, 무슨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외면하다니 큰 충격이었지. 그런데 슬프지는 않고, 마음이 단단해지는 게 느껴지더라고. 단단해진 건지, 딱딱해진 건지. 그런데 가끔 궁금해. 그 친구들은 어떤 이유로 나를 외면했는지, 그리고 같이 여행 간 친구는 그 친구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줬을까 하고. 다행히 이래서 내가 여자애들하고는 안 만나, 이런 사고의 흐름으로 가진 않았어. 그건 좀 웃기잖아. 인간의 반을 외면해야 하는데, 그건 좀 불가능할 것 같더라고. 나중에 내가 유명해지면 걔네들 중 한 명한 테라도 듣고 싶어. 이제 생각해보니, 자기도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를 잃은 대가가 뭔지 알겠다고."
글쟁이 친구의 큰 눈이 끔뻑하자,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안경을 벗고 눈을 비벼댔다. 눈을 비벼서 그런 건지, 울어서 빨개진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왜 내가 발목 수술을 한 줄 알아?"
마지막 차례는 나였다.
"회사 대표가 술 먹다가 나한테 좋아한다면서 키스하려고 해서 도망가다가 발목을 삔 거야. 유부남에 아기도 있는데, 술 먹으면 다 상관없나 봐. 술집에서 벗어나 발목은 아프지, 택시 타려고 하는데 택시는 안 잡히고 애를 먹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아저씨가 나타나더니, 나를 도와주겠다고 말을 거는 거야. 술집에서부터 지켜봤는데, 내가 곤란해 보였다고 말이야. 그때 마침 남자친구한테 전화가 와서 받았어. 남자친구는 내 목소리를 듣고 너무 취한 걸 안 거지. 왜 이렇게 술을 마셨냐고 해서 내가 오늘 회사에서 큰 실수를 해서 사죄의 의미로 술을 마시다가 취했다고 했지. 아저씨가 자꾸 쫓아오는데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안 가고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해서 남자친구에게서 온 전화를 그 아저씨한테 돌렸어.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 아저씨가 매우 점잖은 목소리로 자기가 대학교수라고 하면서 전화번호도 알려주면서 아가씨가 아까부터 직장 상사한테 위험한 처지여서 도와주겠다고 말했대. 남자친구는 전화를 끊고 바로 그 아저씨가 말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는데, 없는 번호로 나오는 거야. 그리고 나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지. 그와 동시에 이런 일이 생겼어. 내가 돌아오지 않으니깐 이상해서 나왔던 회사 대표가 그 아저씨에게 붙잡혀 있는 나를 발견하고 그 아저씨에게 죽일 듯이 덤볐어. 그래서 그 아저씨는 도망갔지. 그리고 회사 대표가 지쳐서 길가에 앉아있을 때, 난 혼자 택시를 타고 가면서 다시 남자친구의 전화를 받게 됐지. 남자친구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전화 통화를 해야 한다고 했어. 엄청 화내고 있었는데, 난 술이 취해서 시간이 흐르면 다 괜찮다고 생각했어. 남자친구의 전화를 언제 받았는지 엄마가 집 앞에 마중을 나와있었어. 그리고 난 안전하게 집으로 귀가를 했지. 다음날 아침에 발목이 너무 아파서 잠이 깼어. 아예 걷지를 못할 정도였어. 나는 엄마가 하자는 대로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았어. 그리고 남자친구는 잠깐 시간을 갖자고 했지. 일주일간 나는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걸을 수 있게 됐고, 남자친구와도 화해했어. 그리고 다니던 회사도 관뒀지. 3년이 흐른 다음에 허리가 아파서 간 정형외과 병원에서 허리가 아픈 게 그때 다친 발목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됐지. 근데 약간 억울한 건 3년 동안 허리가 아파서 통증 외과도 몇 개월 다닌 적 있었는데도 거기에서도 발목을 놓친 거지. 암튼 그래서 발목 인대 재건 수술을 받은 거야. 내가 발목을 다친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뒤에 수원역 여대생 살인 사건이 일어난 거야. 술에 취한 여자친구를 부축하다가 여자친구가 토를 해서 길 위에서 애먹고 있던 남자친구에게 어떤 아저씨가 도와주겠다고 다가와서 물티슈를 사 오라고 말했대. 그리고 남자친구가 다시 왔을 땐 여자친구와 그 아저씨가 사라진 거지. 그래서 실종 사건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시신이 발견되었지. 성폭력 살인 사건이었지. 그 사건이 화제가 되니깐 그 아저씨도 자신이 곧 잡힐 것 같아서 자살하고 그 아저씨의 시신까지 발견되고 나서야 그 사건은 대중에게서 잊혔어. 아주 끔찍한 사건이지. 근데 무서운 건 뭔지 알아? 내가 술에 취해 도망가다가 발목을 다친 그곳이 수원역 근처였어. 동일범인지 그건 모르겠지만, 그 사건을 접하고 등골이 서연 해졌지. 당연히 그 피해 여대생이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어? 그럼, 난 그 아저씨를 쫓아준 회사 대표에게 감사해야 할까, 아님, 애초에 그 대표가 나에게 치근덕거리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아니면 그보다 애초에 내가 그날 회사에 실수를 한 일이 없었으면 그 대표하고 수원역에서 술을 마실 일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야 할까."
나는 말을 더 잇고 싶었지만, 그대로 이야기 끝을 맺었다. 우린 더 이상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랐다.
등 뒤에서 방문이 열리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넌 혼자 방에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 거니?"
이젠 나도 이게 우리의 이야기인지, 나만의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다.
개인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심리적·신체적으로 깊은 상처를 남기는 트라 우마적 사건에 대한 진짜 피해는, 내가 '~했다면(혹은, ~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현재 나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 이 사건에 내가 관여한 것 같을 때, 혹은 주위에서 무신경하게 그런 피드백을 줄 때 고통이 재생산된다. 우리가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약한 정도의 신경증과 약한 정도의 성격장애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현실을 아주 명확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자동적으로 나의 내적 회로에 따라 왜곡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신경증이든 성격장애든 한 쪽으로 치우거나 양 극단으로 치우칠 때, 우리는 영혼이 병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어릴 적에 수용할 수 없었던 기억이 성인이 되어서 의식의 수면 위에 올라온 것은, 더 이상 무의식 영역에서 그 사람을 움직이려 했던 어둠의 그림자를 인식한 것과 같다. 수면 위로 끌어올려 인식할 수 있다면, 해결의 여지가 있다. 친구들과 나는 우리만의 블랙스완적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절대 이대로 끝내선 안 된다. 이제 출발점에 섰을 뿐이다. 블랙스완적 충격으로 인한 신체적·심리적 고통이 있다면, 그것에 대한 치료를 병행하고 사건으로 인한 왜곡된 시선을 자꾸 재조정해나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 고통을 외면해서 평생을 통해 더 거대한 폭풍으로 오지 않게 하려면, 견뎌야만 한다.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경고신호가 뜰 때, 만약 이상적인 '나'라면, 어떻게 선택을 할까,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건 나에게 효과 있었던 방법일 뿐, 개인마다 치료의 과정에서 자신만의 개선 방법이 떠오를 수 있다. 그때부터가 진짜 치료가 되는 순간이다.)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
한 인간의 인생사로 깊게 들어가면, 인간 전체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다. 개인이 경험하여 구축하는 역사 또한 인류의 역사가 될 수 있다. 그 믿음으로 호모사피엔스는 기록과 공감을 위해 뇌의 기능을 증폭 시켰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우리가 책으로, TV로, 이 외에 다양한 매체로 다른 사람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이유가 될 것이다.
「내 안의 블랙스완」을 읽어주신 분들께.
제 이야기가 저만의 이야기 나열에 그치지 않고, 많은 분들의 이야기에 접점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게 어쩔 때는 아무렇지 않다가, 지난날 어린 제가 안타까워 울기도 하고, 더 많은 날은 슬픈 기억이 승화가 된 느낌을 느낌을 받습니다. 아주 가끔은 글 쓰는 걸 후회하고 괴로워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계속하려고 합니다.
꾸준히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합니다.
혼자 공허하게 내뱉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 건 읽어주시는 분들 덕분이죠.